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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기회

등록 2019-05-30 09:47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나는 ‘미투’ 국면에 부딪혔을 때(이 표현이 맞다, 나는 부딪혀서 멍이 들었다) 미투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지 몰라 한동안 언어의 부재에 시달렸다. 왜냐하면 교육 현장에 나가면 청중은 강의가 시작되자마자 강사님은 미투를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는데, (네)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이 교육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미투는 기존 사고체계와 운동을 해석해내는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내게는 ‘혁명’인데 이를테면 메르스와 같은 것이다.

10년 전 여배우 사건

가해자들은 철없던 시절의, 우발적인 사고였으니 선처를 바란다고 사과하기에 급급했다. 이마저도 일말의 양심을 갖춘 자들이 그리했고 대개는 부인했다. 자동차라는 물건에 사고가 나면 사과로 상황을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사건은 처리할 수 없다. 사건은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해석을 반드시 까다롭고 난해한 절차로 인식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건은 저지른 일을 고백하고 책임을 감당하는 게 전부이기도 하다.

10년도 전에 일어난 여배우 ‘사건’을 우리 사회는 어떻게 침묵하며 덮어버렸는가. 한 여성이 권력자들 손에 포획돼 억울하게 죽은 사건이라는 타이틀만 요란하게 생산되다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뉴스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자도, 유통 자체를 막아버리는 자도, 배포되었음에도 거두어 폐기할 수 있는 자도 모두 한통속이라는 무시무시한 짐작이 쏟아져나왔다. 사람들은 희미하게나마 의심했지만, 그뿐이었다. 사실이라 한들 무엇이 달라지랴. 하지만 여기까진 살아 있는 사람들 사정이고 죽어간 사람은 어쩌나.

억울하지만 별수 없다고 치부됐던 죽음이 도처에서 자신을 해석해달라고 떠나지 못하는 것, 옛사람들은 이걸 영혼이 구천을 떠돈다고 이야기하겠지만 지금은 ‘회복적 정의’라고 이른다. 내가 이해하는 회복적 정의는 국가가 자신이 만든 법과 제도를 범죄로 깨뜨려버린 개인을 벌해 국가 체면을 회복하는 게 아니라, 국가에 맞먹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한 사람의 영육 간 강건함을 부숴버려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를 바로잡고 치유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그러나 이 바로잡음은 아무리 노력해도 원상으로 돌릴 수 없다. 부서진 자는 이미 죽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이승에서의 삶은 끝난다. 세상에 이보다 자명한 진실이 어디 있나. 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그를 품은 우주가 파괴됐다는 것이다. 얼굴을 가진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는 그 얼굴 가진 이를 괴롭히고 짓밟는 일보다 더한 끔찍함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지금 이 시각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혹은 보이는 곳에서 ‘얼’을 지닌 인간들이 사라져간다.

회복적 정의는 사치였나

그녀가 죽고 우리가 한 일이라곤 찜찜하니까 빨리 잊어버리려 애쓴 것, 저 유명한 윤창중의 비루한 말처럼 “권력은 섹스를 참을 수 없”나보다 치부하고 넘겨버린 것, 짬짜미로 사건이 덮이는 거 같은데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체념했던 게 전부였다. 나는 이번이 진실을 규명할 마지막 기회라 여겼다. 이 글을 읽는 나와 당신이 그녀와 무연고라 해도 이 ‘사건’이 조속히 처리되지 않고 어떻게 해석돼 우리 귀에 당도하는지 이번에야말로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고 자주 생각했다. 그러나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가 5월20일 발표한 재조사 결과는 눈앞을 캄캄하게 만든다. 회복적 정의는 사치에 불과했을까. 구천을 떠도는 ‘원혼’을 우리는 이제 어찌 달래야 할까.

김민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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