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이자 작가인 랜디 허터 엡스타인이 펴낸 (동녘사이언스)은 호르몬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재미난 과학책이다. 100년 남짓한 호르몬 연구가 ‘미천한 과학’에서 돌팔이 치료법을 전전해 ‘진지한 과학’이 된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는다.
저자에 따르면 인체에는 호르몬 분비샘이 9개가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호르몬만 수십 가지다. 호르몬은 신진대사, 섹스, 행동, 수면, 면역계 등을 조절한다. 사춘기, 갱년기, 폐경기 등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진정한 의미의 첫 과학적 호르몬 연구는 1848년 독일 의사 아놀트 베르톨트의 실험이 꼽힌다. 베르톨트는 고환에 호기심을 갖고 수탉 여섯 마리에게 실험한다. 고환을 다 떼거나, 한쪽만 떼거나, 떼어낸 고환을 엉뚱한 곳에 이식하는 괴상망측한 연구였다. ‘생식샘 자리바꿈’을 해도 정상적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호르몬의 작용 원리를 최초로 설명했다.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오이겐 슈타이나흐는 1920년대부터 거의 20년간 정관수술이 회춘을 도와준다고 주장했다. “정관수술을 하면 진액이 배출되지 않고 몸속에 신속히 축적된다”는 게 지론이었다. 그의 주장은 사람들을 솔깃하게 했고, 확인되지 않은 입소문을 타고 정관수술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슈타이나흐의 이름이 ‘회춘용 정관수술을 집도하다’는 뜻의 동사가 될 정도였다.
이런 엉터리 건강정보와 돌팔이 치료법이 성행하는 중에도 내분비학은 발전적 걸음을 내디뎠다. 당뇨병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인슐린이 발견되고,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 분리됐다.
1930년대 내분비학은 ‘진지한 과학’으로 입지를 굳혔다. “에스트로겐과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겨우 히드록실기 하나만 다를 뿐”인 ‘다른 옷을 입은 쌍둥이’였다는 걸 밝혀냈다. 수컷도 에스트로겐을 만들며, 두 호르몬이 길항하는 화학물질이 아닌 한통속이 되어 행동하는 파트너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호르몬은 미량이라 측정할 수 없다는 상식을 뒤집고 여성과학자 로절린 서스먼 얠로는 호르몬 측정법을 발명했고, 조지아나 시거 존스는 임신호르몬을 분비하는 것은 뇌하수체가 아닌 태반임을 입증했다.
과학자들은 아직 ‘성정체성과 외부 생식기의 불일치’를 초래하는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 그러니 1950년대에 여성과 남성 사이의 ‘간성’으로 태어난 보 로랑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의사가 남자아이로 성별을 정한 그는, 세 살 때 또 다른 의사에게 성기수술을 받아 여자아이가 됐다. 초등학생 때 동성애 욕망을 느끼며 성정체성 혼란을 겪은 그는 어른이 돼 신체의 비밀을 알고 간성인을 위한 권익옹호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저자는 검증되지 않은 성장호르몬 주사의 폐해 등을 짚으며 돌팔이 같기도 한 이런 실험들이 많은 희생을 낳기는 했지만 의사와 과학자들의 광기 덕에 호르몬의 미스터리가 밝혀지고 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고 얘기한다. “젊음을 영원히 유지하는 새로운 방법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스러운 것은 안전하다고 맹신하는 경향에서 벗어나라.” 호르몬 오·남용을 경계하는 저자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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