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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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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도주의 기록

쇠락한 공업지대의 삶을 견뎌낸 한 청년의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
등록 2017-12-16 23:00 수정 2020-05-03 04:28

는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실리콘밸리에서 투자회사를 운영하며 꽤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J.D. 밴스가 31살에 쓴 회고록이자 성공담이다. 그는 정신적·물질적 빈곤이 자녀에게 어떤 심리적 영향을 끼치는지,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과 같은 신분 상승을 이루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그럼에도 과거의 악령은 여전히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글을 썼다고 밝혔다.

미국에선 쇠락한 공업지대에 사는 가난한 백인 하층민을 ‘힐빌리’라고 한다. 화이트트래시(백인 쓰레기), 레드넥(햇볕에 그을려 목이 빨간 노동자)과 비슷한 말이다.

방탕한 룸메이트였던 엄마

오하이오는 한때 신흥 공업도시로 명성을 떨치던 도시들 중 하나였다. 1세대인 작가의 조부모가 공업지대 조성에 발맞춰 처음 이주했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던 그들은 고향에 남은 사람들보다 부유한 삶을 누렸으며 겉보기엔 중산층의 화목한 가족이었다. 그들의 자식들은 태어나자마자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첫 번째 수혜자가 되었다. 배고픔을 몰랐고, 원하는 장난감을 가졌으며, 공교육을 이수했다. 작가의 어머니 베브 블랜턴이 바로 이 2세대 주인공이다. 그의 아들이자 이 책의 저자인 밴스의 뒤를 밟는 악령의 실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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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브 블랜턴은 삼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큰오빠 지미와는 열 살 터울이다. 베브가 태어나고 얼마 뒤 아버지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명예’라는 명분 아래에서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이 용인되던 의리의 시대, 남자의 일과 여자의 일을 명백하게 구분하고 음란한 유머를 즐기면서 무시무시한 성깔을 자랑하는 남자들의 시대. 경제적 안정을 위해 고향을 떠났지만 정기적으로 고향을 찾아가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혈연 중심 세대. 어머니를 욕하는 사람은 흠씬 두들겨패지만 정작 자기 아내는 방치하는 가부장 세대. 그 세대에 속한 베브의 아버지는 날마다 집 밖으로 나돌았으나 남자라면 으레 그렇게 논다는 인식이 확고했다. 어머니는 세상과 담을 쌓고 집 안팎에 강박적으로 쓰레기를 쌓아두었다. 견디다 못한 큰오빠 지미는 18살이 되자마자 독립했고 남은 건 8살 베브와 여동생뿐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베브는 전도유망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졸업도 하기 전에 임신하는 바람에 곧장 결혼했다. 어릴 적 보아왔던 다툼이 결혼생활 내내 반복되자 그는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부모가 마음을 다잡은 건 그 이후였다. 과거에 딸을 돌보지 못했다는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베브의 육아를 돕고 집을 마련해주고 간호대 학비를 대주었다. 부모의 때늦은 사랑은 베브에 대한 것이라기보단 실질적으로 손자 밴스, 이 책의 저자에게 집중되었다. 조부모의 죄책감에서 비롯된 사랑에 힘입어 오늘날 그가 가능했다는 건 자명하다.

베브는 나날이 나빠졌다.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어린 아들에게 남자다움을 가르쳐줄 어른이 필요해서라고 변명했다. 짧은 결혼생활의 말미에는 늘 부부싸움이 과격해졌다. 성미가 불같아서 어떤 싸움이든 지는 걸 싫어했다. 진다는 건 피해자가 된다는 뜻이었다. 바람피우다가 들키면 자살 소동을 벌였다. 술에 진탕 취했다가 깨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반복했다. 그의 자식들은 엄마를 부모가 아니라 방탕한 룸메이트라 여겼다. 어느 날은 어린 아들을 태우고 시속 160km로 달리면서 같이 죽자고 난리를 쳤다. 결국 순찰차 뒷좌석에 태워져 구치소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직업인으로서 그는 더욱 문제적이었다. 간호사인 그는 날마다 술과 약물에 절어 출근했다. 환자들의 약을 빼돌리고,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응급실을 가로질러 다니다가 결국 해고당해 중독치료센터를 들락거렸다. 어머니의 빈번한 부재로 남매는 누군가의 짐짝이 될까, 눈치 보며 살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두려워했으며 밥을 먹다가도 언제 접시가 날아올지 몰라 긴장했다. 툭하면 배가 아팠고 다정한 사람들을 보면 진짜일 리 없다고 믿었다. 심지어 베브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남매에게 그는 내 아버지이므로 제발 내 앞에서 아빠 잃은 사람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는 자신만 슬퍼하기를 원했다. 오로지 슬픔만을 욕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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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해 화해하지 못했다

그는 왜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 왜 모든 상황이 그에게만 불리했을까?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를 피해 일찌감치 집을 떠난 오빠를 대신해, 무기력해진 엄마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엔 여동생의 손을 잡고 매번 뒷문으로 도망쳤던 그. 그때의 베브는 누구보다 듬직한 어른이었다. 언제라도 엄마와 여동생의 손을 잡고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사랑과 혐오를 구분할 수 없는 사람으로 자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에겐 늘 도망쳐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엄마와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대신 아들은 힐빌리에게, 레드넥에겐 쉽게 주어지지 않는 삶을 가졌다. 베브의 선택과 그 결과에 비추어보건대 베브는 살아남으려는 선택 대신 어떻게든 사랑해보겠다는, 사랑이 사랑으로 보답받는 삶을 선택한 듯하다. 그러려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늘 도망쳐야 했으며, 때론 자신에게서마저 도망쳐야 했을 것이다. 쇠락한 도시는 쇠락한 채로 남아 있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 외로운 도주 중인 베브도 힐빌리로 남았다. 그 모두를 힐빌리라고 하는 무수한 입들도 거기, 있다.

황현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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