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한 직장에 소속되지 않은 채 일했던 지난 6년여 동안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 짧은 답을 찾지 못해 늘 곤혹스러웠다. 6년이 넘었으면 적당한 해결책을 찾았을 법도 한데, 해결책은 찾지 못하고 곤혹스러움에만 익숙해졌다. 나는 6년 동안 책을 쓰고 번역을 했으며, 협동조합을 꾸려서 ‘이북’(e-book) 중심 출판업도 했고, 팟캐스트 방송을 진행했고, 투자회사와 컨설팅사에서 일한 전력을 살려 독립 컨설턴트로도 일했다.
얼핏 제각각처럼 보이지만, 이 개별의 일들은 내 머릿속에서 모두 연결돼 하나의 포트폴리오를 이룬다. 어째서 그런지 설명하려면 이 지면을 모조리 허비하게 될 것이다. 내가 쓴 를 읽고 “무슨 일을 하세요?”에 대답하려는 책 같다고 말한 이도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퇴사 권장자’라는 오해를 받아온 터였다). 이제는 답변이 좀 쉬워질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나는 여전히 회사 일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런 곤란을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것 같다. 얼마 전 ‘광화문 1번가’에 발언자로 나선 미디어 스타트업 ‘닷페이스’의 조소담 대표는 자신이 “일자리라고 부를 수 없는 수많은 일을 거쳤”으며 닷페이스를 창업한 뒤에도 여전히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새로운 일의 경계 같은 곳”에서 계속 일한다고 말했다. ‘스타트업’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유연한 단어 같지만, 정책이 원하는 분류 앞에선 여전히 길을 잃는다고 조소담 대표는 털어놓는다. 기존 틀에 맞춰 업을 설명할 수 있어야 ‘창업지원’ 정책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정책적 지원에 최소한의 기준이 필요하겠으나, 현재와 다른 혁신을 기대하면서 동시에 기존 틀 안에서 사업이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면, 여기에는 분명히 모순이 있다. 조소담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분명한 산업의 이름이나 숫자로 된 지표들을 조금 포기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애매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시도를 조금 더 많이 응원하는 체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경험한 사례가 많으면, 새로운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그 덕에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문제를 보아도 지난 사례들 중에서 얼추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력자의 미덕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일의 목표가 과거에 본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재생하거나 복제하는 것에 그치기도 한다. 바탕에 깔린 전제가 흔들리는 시대라면, 재생도 복제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고, 가능하다 해도 무의미한 경우가 허다하다.
뭘 하고 있느냐 묻고는 “내가 했던(혹은 내가 보았던) ○○ 같은 거구나”라고 말씀하는 분들이 있다. 참고해보면 좋은 사례를 알려주는 경우도 있지만, 가끔 그런 식으로 분류되거나 요약되는 것에 불편한 마음이 든다. 과거의 ○○와 같을 수 없는 지점, 얼핏 큰 의미가 없을 디테일처럼 보이는 지점에서 변화가, 가끔씩 혁신이 일어난다. 너무 많은 사례를 아는 탓에 오히려 이런 지점을 놓치게 된다.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새로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과거에는 명확했던 분류로 더 이상 갈라 넣을 수 없는 사람과 사례가 점점 늘어난다면, 애매함을 포용해주는 영역이 필요하다. 과거 기준으로 보아 단일하고 깔끔한 목표는 의미 있는 차이, 지금 막 일어나는 변화를 억누를 가능성이 크다.
짧지 않은 답변을 듣고, 모호한 차이를 모호한 채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아니라면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아예 묻지 않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나부터 고쳐 묻는 연습을 해야겠다. 요즘 제일 관심 있는 문제가 뭐예요? 요즘 무슨 일에 가장 많이 시간을 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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