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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뮤직아지트’

1만원에 커피 마시며 음악 감상하는 힐링 공간 ‘스트라디움’을 떠나보내며
등록 2017-03-30 21:00 수정 2020-05-03 04:28
스트라디움 제공

스트라디움 제공

중고생 시절, 그러니까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에 ‘음악을 듣는다’는 건 뭔가 특별한 수고로움을 필요로 했다. 음반을 사려면 먼저 정보가 필요했다. 미리 들어보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음악 잡지를 사서 읽고 미국 빌보드 차트를 살피며 어떤 음악이 좋을지 끊임없이 탐구해야 했다.

음반을 산 다음에도 수고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카세트테이프로 원하는 곡을 들으려면 그 지점까지 감아야 했다. 이른바 ‘워크맨’이나 ‘마이마이’라고 부르던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의 건전지를 아끼려고 카세트테이프에 육각 볼펜을 끼워 빙글빙글 돌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감을 필요 없는 LP는 지문이라도 묻을까 신줏단지 모시듯 소중히 다뤄야 했고, 그보다 좀 편리해진 CD라 해도 혹여나 상처 날까 신경 쓰이기는 매한가지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음악을 듣는다는 뭔가 특별한 의식 </font></font>

학교나 집에서 음악을 듣는 건 그나마 편한 축이다. 음악을 듣기 위해, 아니 보기 위해 먼 길을 떠나기도 했으니, 바로 ‘엠티브이’(MTV)였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 혜화동까지 찾아간 그곳에선 입장료 몇천원을 내면 콜라를 마시며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었다. 이름이 ‘엠티브이’였던 건, 아마 미국 음악 전문 채널 의 뮤직비디오를 주로 틀어줘서 그랬던 것 같다. 당시 푹 빠져 있던 메탈리카의 명곡 (One)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뭔고 하면,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 자체에 뭔가 특별한 의식 같은 느낌이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스마트폰에 설치한 애플리케이션 하나면 거의 모든 음악을 손쉽게 들을 수 있다. 뮤직비디오를 보려고 혜화동까지 지하철 타고 갈 필요도 없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유튜브로 뮤직비디오를 보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음악을 듣는다는 건, 물을 마시고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행위가 되었다. 난 음악과 늘 함께할 수 있는 이런 환경이 좋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과거의 유물처럼 돼버린 음악 감상 문화가 되살아나는 것이다. 물성이 없는 파일 형태의 음악에 만족 못한 일부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LP를 찾기 시작했고, 아예 음악만을 전문으로 듣는 공간까지 생겨났다.

대기업인 현대카드가 2015년 5월 서울 이태원에 LP를 들을 수 있는 ‘뮤직 라이브러리’를 열더니, 다섯 달 뒤에는 그 맞은편에 ‘스트라디움’이라는 음악 체험 공간이 들어섰다. 디지털 음원 플레이어 제조회사인 아이리버가 고음질 음원 플레이어 ‘아스텔앤컨’을 알리고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든 곳이었다. 음악이 공기처럼 흔해진 시대에 예전처럼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듯 음악에 집중하는 공간이라니! 신선한 역발상에 나는 무릎을 쳤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font></font>
서울 이태원에 있는 ‘뮤직 라이브러리’는 음악을 듣고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 2층에는 다양한 음반과 서적이 진열돼 있다. 현대카드 제공

서울 이태원에 있는 ‘뮤직 라이브러리’는 음악을 듣고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 2층에는 다양한 음반과 서적이 진열돼 있다. 현대카드 제공

스트라디움은 검은색 스피커를 형상화한 건물 모양새만큼이나 내부 구조도 독특하다. 입장료 1만원을 내고 들어가면 1층 사운드 갤러리에서 음악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음악은 우리를 어떻게 사로잡는가’라는 주제를 내걸고 기원전부터 현재까지의 음악을 연대기순으로 정리해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지하로 내려가면 깜짝 놀랄 광경이 펼쳐진다. 아늑한 서재 같은 방에서 신발을 벗고 벽장 같은 공간에 들어가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작은 방에 여럿이 모여 스피커로 음악을 함께 듣는 음악감상실도 2개나 있다.

2층에 올라가면 스튜디오가 나온다. 이곳에서 공연도 하고 음악감상회도 연다. 스트라디움을 운영하는 그루버스의 김경진 이사, 재즈 평론가 황덕호,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 등이 정기적으로 음악감상회를 진행하는데, 보통 30~40명이 온다고 한다. 건물 꼭대기에는 카페가 있다. 입장료 1만원에 포함된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옥상 정원에선 남산이 올려다보인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만한 힐링 공간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이 사랑스러운 공간이, 3월까지만 문을 열고 4월부터는 사라진다. 아이리버는 3월 초 스트라디움을 폐지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운영 비용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어서라고 한다. 애초 건물주와 임대 계약을 한 기간은 5년이다. 그런데 불과 1년5개월 만에 사업을 접어버린 것이다. 스트라디움 폐지 뒤 이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불투명하다. 사용을 원하는 이들에게 대관해주는 방식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며칠 뒤면 사라질 스트라디움을 마지막으로 찾았다. 구석구석 눈에 담고 귀에 담고 가슴에 담았다. 김경진 이사는 “올해 들어 하루 100명씩은 꾸준히 찾아주었다. 주말에는 20~30대 젊은 층이 70%가 넘는다. 음악을 듣는 데 선뜻 1만원이나 낸다는 걸 감안하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입소문도 나고 음악 감상 문화를 점차 끌어올리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문을 닫게 돼 많이 아쉽다”고 말했다. 환한 봄 햇살을 맞으며 스트라디움을 나서는데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굿바이 척 베리, 아듀 스트라디움’ </font></font>

바로 앞 횡단보도를 건너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로 향했다. 현대카드 회원이면 무료로 들어갈 수 있다. 20대 여성 몇 명이 각자 고른 LP를 듣고 있었다. 나는 1960년에 발매된 낡은 LP를 골라 들었다. 지난 3월18일 90살 나이로 세상을 떠난 로큰롤의 전설 척 베리의 음반 (Rockin’ At The Hops)였다. 턴테이블에 올리고 바늘을 걸치니 첫 곡 (Bye Bye Johnny)가 흘러나왔다. 척 베리의 가장 큰 히트곡 (Johnny B. Goode)의 후일담 같은 곡이다.

노래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바이 바이 조니/ 굿바이 조니 비 구드.”(Bye bye Johnny/ Good bye Johnny B. Goode) 이걸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바이 바이 조니, 굿바이 척 베리, 아듀 스트라디움.’ 흥겨운 로큰롤을 듣는데 왠지 서글퍼졌다.

서정민 씨네플레이 대표·전 대중음악 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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