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이 싫어서’의 주요 장면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감독 장건재)는 20대 후반 여성인 계나(고아성)가 ‘한국이 싫어서’ 그냥 떠나려는 영화다. 한마디를 더 붙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떠나려 하고, 떠나가기 위해 벌이는 일련의 사건과 감정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플롯은 대단치 않다. 오히려 익숙하다. 영화는 내내 한국과 한국이 아닌 곳을 오가며 담담하고 정직하게 우리의 오늘을 살핀다
계나의 남자친구 지명(김우겸)은 ‘한국이 싫어도’ 떠나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살아왔는데 그냥 떠날 수 있느냐고 강변한다. 계나도 바다 건너 섬나라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쯤은 안다. 하지만 여기서는 도저히 더 버틸 수 없기 때문에 겨우 다른 선택을 하려는 것이다. 더군다나 계나는 훌쩍 떠났다가 언제든 다시 돌아오면 비벼볼 언덕이나 여유가 있는 ‘금수저’가 아니다. 남들 보기엔 그럴싸한 직장에 다니는 것 같지만 이 악물고 오늘을 버텨야 내일을 살아갈 기회가 주어지는 모래알같이 흔한 ‘흙수저’일 뿐이다. 그런 계나에게 지명은 그럼 동남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행복해 보이냐고 묻는다. 계나는 발끈한다. ‘금수저’인 지명에게 한국은 그런 나라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겐 기회가 주어지는 땅.’
계나의 부모는 한국에서밖에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삶은 살다보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었고, 그렇게 살다보니 살아지게 된 것이었다. 땅값이 오를 리 없는 변두리 아파트지만, 24평 새 아파트에 들어가는 그날만 오면 더할 나위 없을 사람들이다. 허리가 아파 죽겠어도 경비 일 나가는 남편에게 손수 도시락을 싸줘야 직성이 풀리는 계나의 엄마는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망설이다가 ‘그저 가족들 안 아픈 것이 좋다’고 말한다. 계나의 아빠는 하루를 어떻게 버티건 저녁에 막걸리를 한잔해야 잠에 들 수 있다.
2015년 출간된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한국이 싫어서’는 하여튼 한국을 살아가야 하는 ‘청춘’의 이야기를 하며 동시에 ‘한국’이라고 하는 실제는 무엇이고 그 반대말의 실체가 혹시 ‘행복’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영화다. 계나와 그 주변 친구들 그리고 계나의 가족이 사는 각각의 한국을 교차해 담담히 보여주며 행복하지 않은 현실과 괄호 쳐진 행복 사이 시공간을 넘나든다.
계나는 십수 년째 재개발 펼침막이 펄럭이는 인천의 작은 다세대 주택에서 동생과 한방을 쓰며 산다. 첫딸이다. 계나의 부모는 “자식 공부할 때 보태준 것이 없어 한”이지만 번듯하게 자란 ‘케이(K)-장녀’가 자랑스럽다. 그 자랑스러움은 대학 나오고 취업도 한 딸이라면, 24평 아파트에 들어갈 중도금 3천만원쯤은 보태줄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한국적 정서 혹은 기대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계나는 3천만원이 있다. 그 3천만원은 계나가 삶의 방향과 속도를 헌납한 대가로 얻어낸 삶의 전부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마을버스 열두 정거장을 거쳐 지하철 1호선을 탔다가, 다시 2호선에 올라 강남으로 출근하며 번 돈이다. 출근이라고 쓰고 생존 투쟁 혹은 탈진이라고 읽어야 할 2시간의 여정을 아침저녁으로 리바이벌하며 악착같이 모은 내 돈이다. 자취하면 편했겠지만 엄마가 차려주는 눈칫밥을 꾸역꾸역 먹은 이유다. 계나는 당장 사는 집 보일러가 고장 나서 침낭을 뒤집어쓰고 사는데도 곧 새 아파트에 입주할 것이니 세 번의 겨울만 버텨보자고 하는 엄마가 24평 아파트에 집착하는 이유를 답답해한다. 딸의 행복은 24평 아파트에서 동생과 방을 따로 쓰는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장 오늘 춥지 않게 사는 것에 있다는 걸 엄마는 알 수 없다.
강자들의 위협과 이미 달성할 수 없을 꿈 사이에서 언제나 숨 막혔던 계나는 안다. 돈 많은 집에서 태어난 ‘스카이(SKY) 출신’이 아닌 자신이 한국에선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꼭 멸종되어야 할 동물 같다”는 것을. 하지만 들키지 않으려 한다. 아니 한국 사회는 그걸 들킬 시간조차 주지 않는지 모른다. 언제나 열심히 일하라고 조질 뿐이다. 그만하겠다고 하면 ‘돈 많냐, 어디 더 좋은 곳으로 가느냐’만 추궁한다. 그렇게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이란 때론 점수를 조작해 상사가 유지해온 ‘관계’를 지켜주는 일인데, 그 부조리함을 한국 사회는 때때로 사람 간의 ‘신뢰’라고 부른다.
‘한국이 싫어서’에는 이처럼 한국을 한국이게 하는 심층 구조들이 우화처럼 박혀 있다. 우리가 통과해온 이상한 사회를 지금의 청년들도 어쩔 도리 없이 냉소하거나 체념하면서 묵묵히 건넌다. 2024년 초, 20대 초중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며 학교를 마치면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한 여학생이 “기자가 되고 싶지만 못 되면 교육학 전공을 살려 선생님을 딱 10년만 하고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대답했다. 취업을 위해 엄청난 ‘스펙’을 준비하는 동시에 취업 이후의 삶을 꿈꾸며 오늘의 행복은 기꺼이 유예하는 것처럼 보이던 학생이었는데 의외였다. 그렇게 취업하고 싶은데 왜 또 떠나고 싶은 걸까. 그날 강의 때는 차마 묻지 못했는데, 계나와 그 친구들이 청춘의 대답을 대신 해주고 있었다. “내가 회사를 선택한 게 아니라 회사가 나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교육학을 전공하지만 그건 수능 성적에 따른 선택이었을 뿐이고, 기자가 되고 싶지만 그 선택을 얻어내는 것 또한 쉽지 않으니 결국 무엇도 선택하지 못하게 되면 떠나는 걸 선택하겠노라고.
‘한국이 싫어서’는 보통의 청춘들이 겪는 무력감과 비관을 보여주지만, 그 사이마다 맺혀 있는 가능성을 잊지 않음으로써 보편성을 획득해간다. 그걸 바탕으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공통된 불안을 드러낸다. 스위스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레, 2005)에서 현대인이 모두 ‘지위로 인한 불안’을 앓는다고 진단했다. 신분제 같은 민주화 이전의 질서가 타파된 이후 모두가 지위나 신분 상승 가능성을 얻게 된 상황처럼 보이지만 그 기회의 열림이 역설적으로 인간을 더 불안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불안은 누군가와 비교당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평가하느냐로 자아가 형성되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지위 획득이나 신분 상승 궤도에서 이탈한 이들을 실패자로 규정한다.
그럼 그 기회의 주어짐은 공정하고 균등한가. 뻔한 질문이다. 여기에 ‘한국적’이란 접두사를 붙이면 상황은 더욱 고약해진다. 자본에 의한 등급화가 만국 공통의 현상이라면 한국 사회는 여기에 더해 교육, 지역, 문화, 자격의 서열 위계에 따른 차별이 존재한다. 여성, 청년, 지역민의 정체성이 겹친 계나 같은 이들은 이 위계의 가장 밑자리를 차지하는 하위 존재다. 계나와 그 친구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어딘가 하나 부족한 그런 존재들이다.
소설 ‘한국이 싫어서’가 출간될 무렵 유행했던 ‘헬조선’과 ‘탈조선’ 담론은 이런 현실에 대한 청년들의 체념적 언술이었다. 문화평론가 양기민은 이에 대해 ‘상상계 용어인 지옥과 전근대적 명명인 조선이 조합된 감각적 ‘자기혐오’’라고 표현했다. 죽을힘을 다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봤자 집값 등 더 빨리 오르는 무엇을 감당할 수 없고 스펙을 쌓아 대기업에 간들 더는 인생 역전이 아니라는 자각이었다. 무엇을 선택해도 ‘노답’인 상황에서 다른 현실을 꿈꾸는 방식은 ‘탈조선’ 즉, 떠나가는 것밖에 없다는 자조였다.
그때 계나는 뉴질랜드를 선택했다. 거긴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이었을까. 언어의 벽은 소통의 단절이었고 인종차별이란 덫도 곳곳에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를 살아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계나가 그만큼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그 정도 불행에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지명은 남았고, 원하던 기자가 됐다. 하지만 언론사가 그냥 “들어가고 싶긴 했던 곳”일 뿐 이상향이 아님도 알게 됐다. 사랑을 속삭이다가도 새벽 5시 알람에 일어나 보고하고 출근해야 하는 초보 기자의 삶은 행복에서 한참 어긋나 보이지만, 지명은 한국 방식대로 성실하고 사려 깊게 자존감을 지켜낸다.
영화는 계나가 배낭을 메고 뉴질랜드가 아닌 또 다른 어딘가로 떠나며 끝난다. 계나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행복이란 말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것 또한 알게 됐다. 근데 그걸 계나가 어디서 알게 됐느냐고. 첫차가 다니기 임박할 무렵 제일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래서 여기가 바로 ‘새벽의 나라’ 한국이구나 깨닫곤 하는 24시간 영업하는 패스트푸드점에서다. 탈조선 이후 10년, 한국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우리는 여전히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처럼 산다. 그사이 ‘K’를 접두어로 붙이는 문화의 시대와 올드하고 또 올드한 ‘뉴라이트’가 득세하는 이상한 정치의 시간이 뜻밖에도 함께 도착했다. 마치 ‘봐라, 마치 이게 바로 한국이다’라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정말 우직한 것은 그 말뿐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이 싫어서.’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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