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국극. 연기로 승부를 거는 연극과 다르고, 한 사람이 모든 배역을 도맡는 판소리와도 다르다. 춘향이부터 향단이까지 다시 방자부터 이몽룡까지. 배우는 전원 여자다. 소리, 춤, 연기, 모두 빠질 것 없는 최고의 여성들만이 국극 무대에 오를 자격을 갖는다.” 웹툰 ‘정년이’가 여성국극을 소개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보기 전까지는 여성국극이 뭔지 몰랐다. 여성국극은 1948년 10월 서울에서 ‘옥중화’가 공연된 것을 시작으로 해방 이후의 혼란기와 전쟁 시기를 겪으며 피폐해진 당시 사회에서 새로운 문화적 활력을 북돋우며 빠르게 팬덤을 형성했다.
단지 ‘새롭다’는 것만으로는 남성 배역까지 모두 여성이 맡은 여성국극의 의미를 다 담아내긴 어려울 것이다. 이런 시도는 당시 사회에서 전통적 성별 관념을 전복시키며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향한 저항성을 보여줬다고 평가된다. 국극 공동체는 여성의 주체성과 자율성 그리고 연대가 구현되는 ‘사회’이기도 했으며 다양한 가능성이 열린 공간이기도 했다. 이런 여성국극, 그리고 국극 공동체는 동시대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며 함께 성장했다. 안타깝게도 여성국극은 짧고도 아름답게 주목받다가 가부장적 사회의 견제와 1950년대 중후반 등장한 ‘텔레비죤’의 물결에 밀려 우리 시야에서 벗어나게 된다.
어떤 문화는 사라지면 끝이지만, 어떤 것은 언제라도 발굴돼 재해석되고 재구성되곤 한다. ‘정년이’가 그렇다. 웹툰의 인기가 여성국극 공연으로 이어지게 했고, 마침내 드라마로 제작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웹툰 `정년이'를 재미있게 봤던 독자이자 드라마 덕후로서 좋아하던 웹툰이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소문을 들은 순간부터 손꼽아 기다려왔다. 웹툰으로 상상하며 보던 장면이 드라마에서는 어떻게 구현됐을지 기대하면서.
드라마 ‘정년이’는 성공 요인을 두루 갖췄다. 우선 여성국극이라는 생소한 장르를 시대적 배경과 함께 잘 재현했다. ‘춘향전’ ‘자명고’ 등 국극 공연 장면을 극중극 형태로 제법 길게 공들여 배치한 덕분에 시각적·청각적 만족도도 높다. ‘드라마’로서도 성공적이다. 제작진이 레퍼런스로 삼은 “‘대장금’의 장금과 금영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천재 윤정년(김태리)과 음악가 가정에서 자란 노력형 천재 허영서(신예은)를 중심으로 한 성장 서사는 실패 가능성이 적은 익숙한 레퍼토리다. 여기에 여성들의 질투와 우정과 연대를 제대로 ‘말아주는’ 여성 서사와 1950년대 사회를 재현한 시대극으로서의 매력이 더해졌으니 드라마 ‘정년이’의 장점은 ‘익숙한 새로움’일 것이다.
‘익숙한 새로움’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매란국극단 스타 배우 문옥경(정은채)의 말처럼 “비슷비슷한 줄거리, 이름만 달라졌지 똑같은 캐릭터”를 반복하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말이다. 드라마 ‘정년이’는 어떨까? 여성국극 세계의 매력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지만, ‘익숙함’이라는 안전지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드라마 ‘정년이’는 여성국극과 시대극이라는 외피만 달라졌지, 그 안의 구성은 그간 우리가 보아온 다른 드라마들과 비슷하다. 이번 회에서 주인공(정년)이 사고를 치면, 다음 회에서는 해결되고, (반성은커녕) 또 무리한 도전 끝에 실패한 뒤 교훈을 얻고, 그를 질투한 이들이 판 함정에 빠지지만 주변인에 의해 위기를 모면하는 행운이 반복되는 흐름 말이다. 이런 구성은 폭넓은 대중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티브이 드라마가 취할 수 있는 비교적 안전한 전략일 것이다. 대중은 익숙함을 지긋지긋해하기도 하지만, 그 익숙함을 사랑하기도 하니까. 익숙함의 범주를 벗어난 서사가 수용되기까지는 순응과 저항이 복잡하게 공존하고 충돌하기 마련인데 티브이 드라마는 그 충돌을 최소화하되 수용자의 폭을 넓히며 보편성을 획득해왔다. 그런 가운데 보편성과 굳은 관습에서 한 걸음 나아간 문제적 드라마의 등장으로 익숙함과 새로움이 조화를 이루며 진보해 왔다. 드라마 `정년이'는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 어디쯤 있는 걸까? 이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웹툰 ‘정년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웹툰 ‘정년이’는 드라마와 비슷한 서사 구조를 가졌지만 다르다. 정년과 영서라는 다른 결의 매력을 가진 두 천재의 성장과 여성국극 공동체의 갈등과 연대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닮았지만, 그것에만 초점을 두지 않는다. 웹툰은 여성국극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시대의 변화와 그런 변화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예술인들의 고뇌와 연대를 보여준다. 또한 가부장제에 관한 문제의식과 퀴어 서사가 줄거리의 한 축을 담당한다.
웹툰과 드라마의 결정적 차이를 꼽자면, 권부용과 고 사장의 부재일 것이다. 제작진은 “정년과 영서의 관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며 부용을 삭제한 이유를 밝혔다. 물론 드라마가 원작의 복사본일 필요는 없다. 137화 분량의 원작을 12부작 드라마로 만들어야 했으니 부용과 고 사장을 삭제한 이유가 이해된다. 다만 “무대에 선다는 건 한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세계를 만드는 일”이라던 원작 속 정년의 말처럼 드라마에서 한 사람이 삭제되는 일이란, 단지 그 인물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세계’가 사라지는 일임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웹툰에서 부용은 정년의 ‘1호 팬’으로서 정년이 매란국극단 연구생이 되기 전부터 인연을 맺는다. 그 후 ‘흙감자’ 정년을 지지하고 도우며 관계를 쌓아간다. 부용은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이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 “여자애는 여자애를 만나지만 여자는 남자를 만”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그 시대에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한 채 부모의 뜻에 따라 남성과 결혼하려 한다. 그러던 부용은 결국 결혼을 거부하고 정년과 우정을 넘어선 사랑을 이룬다. 웹툰은 정년과 부용의 관계 변화를 그린 백합물(소년 간 사랑을 다룬 장르)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웹툰은 가부장제의 문제도 주목하여 보여준다. 부용의 엄마, 이경자는 남편이자 극작가인 권영섭에게 글을 빼앗긴 채 ‘고스트 라이터’로 살아간다. 남편에게 글을 빼앗긴 그는 괴로워하다가 알코올중독자가 된다. 경자는 가부장제 아래 제 이름을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가는 당대 여성을 대표한다.
정년이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파스텔 다방’ 단골손님 고 사장은 중절모에 양복을 입은 남성이지만, 사실 ‘남장 여자’다. 고 사장은 여성으로서 무시당한 경험을 한 뒤 “세상은 거대한 여성국극 무대”와 같아서 사람들은 국극 배우처럼 “이성적이고 용감하고 근육질인 남자와 상냥하고 사랑스럽고 가녀린 여자를 연기하며” 산다는 걸 간파한다. 결국 그는 남장을 함으로써 “괴물이 돼서 이 역할극을 망치”기를 선택한 것이다. 정년은 고 사장에게서 남성의 몸짓과 말투 등 남성성을 재현하는 법을 배운다.
남성들로만 짜인 국극 세계에 저항하며 탄생한 여성국극은 태생부터 가부장제를 비판적으로 재현하고 전복하고자 하는 의미가 컸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성국극 무대 자체가 가부장제에 억눌린 당대 여성이 상상한 새로운 세계 아니었을까? 이런 여성국극이 약 60년 뒤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에 웹툰 ‘정년이’를 통해 소환된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여성국극과 페미니즘 리부트는 다른 시기에 등장한 흐름이지만 ‘동시대’의 문제의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연결돼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용과 고 사장은 이성애·가부장 사회를 향한 문제의식을 담은 인물로서 독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렇게 웹툰은 ‘동시대’ 여성 대중이 원하는 서사를 구현한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드라마는 이런 동시대적 맥락을 삭제했기에 그저 천재가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성장하는 20년 전 작품(‘대장금’)과 같은 익숙한 서사를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제작진의 선택이 정말 정년과 영서의 성장 서사에 집중하기 위한 현실적 고려였는지, 페미니즘과 퀴어라는 논쟁적 요소를 배제하고자 한 모종의 이유 때문인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으나, 이를 통해 티브이 드라마의 한계를 체감하게 된다. 페미니즘이나 퀴어 서사를 표방한 드라마는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 대중의 편견 어린 시선도 넘어야 할 허들이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보수적 여론 앞에서 ‘멈춤’을 강요당하곤 한다. 최근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된 ‘대도시의 사랑법’(티빙)이 대표적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방영을 앞두고 반동성애 단체의 거센 항의를 받고 예고편을 삭제하기도 했다. 이런 적대적 분위기를 뚫고 콘텐츠를 제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사라진 부용과 고 사장이 더 아쉽다. 물론 논쟁과 저항을 불러왔겠지만 부용과 고 사장을 통해 우리는 더 넓은 세계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서두에 소개한 여성국극에 관한 설명의 다음 대목은 이렇다. “왕자가 사라진 이 시대의 왕자가 되어 인기와 명성 그리고….” 문장의 맺음말이 웹툰 초반에는 “돈을 가마니로 번당께!”라는 정년의 당찬 외침으로 끝나지만, 마지막 회에는 “사랑을 얻는다”로 끝난다. 돈을 벌고 싶어 집을 떠나 국극을 시작한 정년, 자신을 무시하는 엄마에게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누구보다 국극을 사랑한 영서, 그리고 마침내 사랑을 얻은 부용 등 “왕자가 사라진 시대”에 여성들은 또 다른 왕자를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왕자가 되기를, 서로에게 왕자이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누구의 욕망도, 꿈도, 사랑도 배제되지 않고 서로 연대한다. 이것이 웹툰 `정년이'가 보여준 ‘동시대성’이다. 나는 드라마에서도 이런 서사를 만나고 싶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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