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4일, 일본 도쿄 기치조지역 인근 번화가에 흰색 쫄쫄이 레깅스를 입은 세 남자가 거리를 활보했다. 몸매가 훤히 드러나지만 아무도 그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셋은 공사 중 출입금지를 알리는 콘과 음료수 캔을 활용해 중요 부위를 가리는 등 퍼포먼스를 하며 마음껏 깔깔댔다. 세 남자는 13년 전 지상파 방송에서 ‘흰색 쫄쫄이’로 시청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개그콘서트’ 인기 코너 ‘발레리노’ 출연자들인 박성광, 송준근, 송영길이다. ‘발레리노’는 250년 역사를 자랑하는 러시아 발레단을 배경으로 발레리노들이 연습 중 중요 부위를 가리려고 고군분투하는 코미디다. 파격적인 설정으로 2011년 7개월여간 방영되며 화제를 모았는데, 특정 신체 부위에 집중해 선정적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박성광은 “당시 ‘발레리노’가 한국보다 (성적 표현의) 수위가 높은 일본에서 공개되면 대박 났을 거라는 말도 나왔다”고 말했다.
그 말이 씨가 되어 13년 만에 싹을 틔울 줄은 몰랐다. 2011년 발레리노들은 2024년 일본에서 다시 ‘쫄쫄이’를 꺼내 입었다. 한국방송(KBS2)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콘서트’가 일본 공연에 ‘발레리노’를 소환한 것이다. ‘개그콘서트’는 한·일 코미디 교류 차원으로 9월5일 도쿄 제프 하네다 공연장에서 일본 코미디언들과 합동 공연을 했다. 한국 코미디 프로그램의 첫 일본 진출이다. 이재현 ‘개그콘서트’ 피디는 “기존 코너에 ‘갸루상’ 등 일본에서 통할 법한 예전 코너와 캐릭터를 추가했다”며 “‘발레리노’는 슬랩스틱 등의 요소가 포함돼 일본에서 반응이 좋을 것 같았다”고 했다.
과연 일본으로 간 발레리노들은 이질감 없이 스며들었다. 다음날 공연에 활용할 사진 촬영차 1시간30분 동안 거리를 활보하는 이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시선은 없었다. 이들은 ‘쫄쫄이’를 입고 대형 쇼핑몰을 누비고, 노상에서 사람들과도 어울렸다. 송준근은 “평소 거리에서 코스프레를 많이 해서인지 우리를 곁눈질로 보기는 해도 대놓고 쳐다보지는 않더라”라고 했다. “오히려 저희가 거리에서 신기한 사람을 발견하고 다가갔는데, 유튜브를 찍던 ‘갸루상’ 박성호 형이었어요. 하하하.”(송영길)
‘익숙한’ 코미디에 공연장에서도 웃음이 빵빵 터졌다. 13년 전 한국에서보다 수위가 높았는데 일본 관객은 ‘아는 맛’인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성광스키(박성광)는 중요 부위가 드러날 때마다 바나나 모양이 그려진 ‘도쿄 바나나’ 과자 상자로 그곳을 가렸다. 바나나 모양이 위아래로 바뀔 때마다 한국 관객은 놀랐지만, 일본 관객은 즐거워했다. 오히려 일본 관객이 놀란 부분은 ‘발레리노’에 담긴 서사였다. 이날 공연을 본 일본인 요코는 “드라마처럼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면서 웃음을 주는 게 흥미롭다”고 했다. ‘쫄쫄이’는 어땠는지 묻자 답이 돌아왔다. “그게 왜요?”
13년 만에 무대를 누빈 ‘발레리노’와 함께, 서사를 담은 케이(K) 코미디는 이날 일본에 제대로 전파됐다. ‘개그콘서트’가 일본 공연에서 선보인 한국 코너 10개 중 절반 이상이 일상의 어떤 상황에서 웃음을 뽑는 콩트였다. ‘데프콘 어때요’는 소개팅에서 상대방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법한 행동으로 웃기고, ‘습관적 부부’도 서로 다투면서도 습관적으로 서로를 생각하는 의외의 행동으로 콩트를 짜 웃긴다. 그동안 한국 코미디는 언어와 문화를 모르면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외국 진출을 시도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대사 없는 소리와 몸짓으로만 웃기는 논버벌 코미디를 선보이는 팀 ‘옹알스’가 전세계 유명 코미디 페스티벌에서 주목받은 정도다.
실제로, 이날 선보인 일본 코미디는 한국 코미디와 확연히 달랐다. 일본 유명 연예기획사 요시모토 흥업으로 대표되는 일본 코미디언들은 만담 콤비 카우카우를 제외하고 주로 묘기 같은 장기를 선보였다. 기요카와 유지는 하모니카를 입에 넣고 불며 스카이콩콩을 타면서 줄넘기를 했고, 웨스피는 상의 탈의 상태에서 가슴과 드론 등을 이용해 테이블보를 뺐다. 이치가와 고이쿠치는 자신의 ‘방귀’로 풍선을 터뜨리고 오리 울음소리까지 흉내 냈다. 요시모토흥업 한국지사 김진중 대표는 “무대에서 진짜 방귀를 뀐다. 공연이 있으면 2~3일 전부터 식단을 조절하면서 방귀가 잘 나오게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코미디다. 그나마 가게야마 콤비가 선후배가 다다미 문을 가운데 두고 대화하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상황극을 선보였지만, 선배 역할을 맡은 마스다 고헤이가 석고대죄하는 장면에서 전라 상태의 옆모습이 그대로 노출됐다. 마스다는 “한국에서는 모자이크 없이 방송할 수 없다”는 말에 놀라면서 반문했다. “그게 진짜예요? 왜요?”
이처럼 물과 기름 같아서 절대 섞이지 않을 것 같던 코미디 시장에서 ‘개그콘서트’의 정면 승부는 성공했다. 무대 양옆에 띄워진 모니터 자막만으로는 문화와 정서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는데도 관객들은 계속 웃었다. 일본인 관객 기요미는 “일본에는 커플 코미디가 없어서 ‘데프콘 어때요’가 눈에 띄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상황 자체를 알 것 같았다”고 했다. 코미디언 이치가와도 “‘습관적 부부’가 인상적이었다. 답답한 남녀 관계를 담은 거 같은데, 따지고 보면 인류는 대체로 다 그렇지 않냐”고 했다. 관객의 고민을 들어주는 ‘소통왕 말자할매’를 진행한 김영희는 “감성과 문화 등 모든 것이 달라서 일본 관객들이 이해할까 고민했는데, 웃음은 만국공통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고 했다.
부침 겪는 코미디 시장, 끌고 가는 K-코미디언들
결국, 보편적 정서가 통했다는 점에서 ‘개그콘서트’ 일본 공연은 케이 코미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는 시간도 됐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영화 ‘기생충’ 등 케이 콘텐츠가 글로벌 인기를 얻은 건 보편적인 주제에 한국형 서사가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코미디에서도 그 가능성을 본 것이다. 김진중 대표는 “드라마 등을 통해 한국적 상황에 익숙해진 이들이 언어를 알지 못하더라도 대략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됐다. 그 감정이 공유되면서 한국적 코미디도 가능해진 것 같다”며 “코미디도 쉽고 보편적인 설정을 차용한다면 대사가 많은 건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부침을 겪는 국내 코미디 시장을 돌아보는 계기도 됐다. 이날 한국 코미디를 처음 접한 일본 코미디언들은 다채로운 소재와 형식에 감탄했다. 이치가와는 “한국 코미디는 굉장히 트렌디해서 일본 개그가 오히려 뒤처져 있다고 느꼈을 정도”라고 했다. 카우카우의 다다 겐겐지는 “‘숏폼플레이’처럼 한 코너에 많은 인원이 등장하는 것이 신선하다”고 했고, 구마다 마사시는 “‘소통왕 말자할매’처럼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극을 끌고 가는 코미디는 일본에는 없다. 대단하다”고 했다. 이런 코너를 한국 코미디언들은 매주 하나씩 짠다. 전세계에서 유일하다. 그런데도 한국은 코미디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 현재 남아 있는 티브이 코미디 프로그램도 ‘개그콘서트’가 유일하다. 이마저도 많은 이들이 보기 어려운 일요일 밤 11시에 편성됐다.
어려운 코미디 시장을 멱살 잡고 끌고 온 것 역시 코미디언들이다. 이들은 ‘개그콘서트’마저 잠정 폐지되는 등 티브이 코미디 시장이 죽자 유튜브로 떠났고 그곳에서 시행착오를 거쳐 ‘알아서’ 스타로 성장했다. 이들이 다시 무대로, 티브이로 건너가 코미디 시장을 살리고 있다. 한·일 교류도 코미디 공연 시장이 살아나면서 가능해졌다. 김준호는 ‘부산 코미디 페스티벌’을 시작한 뒤 꾸준히 일본 코미디언들을 초대했고, 윤형빈은 ‘윤형빈 소극장’을 직접 열어 ‘한일 코미디 축제’ 등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유튜브에서 스타가 된 곽범, 이창호 등이 소속된 메타코미디도 2024년 9월 한·일 합작 코미디 공연을 선보인 데 이어 최근에는 유튜브 콘텐츠를 협업했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결국 ‘개그콘서트’의 일본 진출에까지 이른 것이다. 윤형빈은 “케이 콘텐츠 중에 코미디만 국외 진출이 없다. 안 될 것 같아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해볼 만하다는 걸 느끼고 있다. 계속 두드리면 열릴 것 같다”며 “‘개그콘서트’의 일본 공연이 그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날 공연은 1200석이 순식간에 매진됐고, 공연 시작 한두 시간 전부터 줄이 길게 늘어섰다.
‘발레리노’들은 13년 만에 꺼낸 ‘쫄쫄이’를 다시 벗어 던졌다. 언제 다시 입게 될지 기약은 없다. 박성광은 “13년 전에 벗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막연하게 곧 다시 입을 날이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일본 공연 당시 ‘이러다가 일본에서 데뷔하는 거 아닐까’라는 기대감이 들 정도로 반응이 좋았기 때문”이다. 김상미 ‘개그콘서트’ 피디는 “이번 공연을 통해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며 “문화 디스카운트를 넘어 한국 코미디가 세계인들을 웃길 수 있도록 계속 도전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남지은 한겨레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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