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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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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제리

고양이와 함께 살다보니 세상 느긋한 개가 되었다네
등록 2016-06-17 17:14 수정 2020-05-03 04:28

내 이름은 제리, 개다.
만세가 늘 ‘제리 형님’이라고 부르는 그 제리다. 만세가 “오늘은 글을 쓸 기분이 아니야”라며 의기소침해져 있어 내가 지면을 대신 메워주기로 했다. 만세가 며칠 전 큰일을 치렀다. 목욕을 했다. 만세에게 세상에서 가장 싫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첫째도 둘째도 목욕이라고 할 거다. 얼마나 싫었으면 이번에는 목욕하던 중에 다른 ‘큰일’도 봤다. 청결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고양이가 주인이 보는 앞에서 똥을 싸버린 정도면, 그가 얼마나 심각하게 목욕을 싫어하는지 알 수 있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만세는, 그를 목욕시킨 남자 주인을 보면 도망을 가고, 혓바닥이 닳도록 비누 냄새 나는 털을 고르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가끔 내 안부를 궁금해하는 몇 안 되는 독자들에게 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신소윤 기자

신소윤 기자

나의 종은 치와와. 나처럼 까만 털이 난 치와와를 블랙탄이라고 부르더라. 개량을 거쳐 털이 긴 종류도 있지만, 나는 단모종이다. 남미 태생의 치와와는 선천적으로 추위를 많이 탄다. 덩치가 작고 겁이 많다. 신경질적인 친구도 많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고 겁이 많긴 하지만, 성격은 유순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세상 느긋한 고양이와 함께 살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만세와 나는 2011년 4월부터 같이 살았다. 내가 먼저 주인들과 살고 있었고, 만세가 나중에 들어왔다. 만세가 오기 전엔 톰이라는 고양이와 잠깐 같이 살았다. 가끔 어디 가서 내 이름을 소개하면 어떤 사람들은 만화 를 연상하며 “제리? 그럼 톰은 어디 있어요?”라고 묻기도 하는데, 톰은 5년 전 별이 되어 하늘로 갔다. 회색 고양이인 톰과 까맣고 작은 내가 같이 붙어 있으면 꼭 그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보였다. 이렇게 말하면 만세한테 좀 미안한데, 톰은 평생 그런 고양이를 본 적 없을 정도로 상냥하고 사려 깊은 고양이였다. 주인이 톰을 너무 좋아해서 질투가 날 정도였다. 깨가 쏟아지는 톰과 남자 주인의 모습을 보기 싫어 어릴 적 나는 한동안 등을 돌리고 벽을 보고 지낸 적도 있었다.

나는 겉으론 건강해 보이지만 안 아픈 곳이 없다. 다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눈도 잘 안 보이고…. 주인들은 톰이 병들어 죽고, 나까지 몸이 아픈 것은 약하게 태어날 수밖에 없는 출생 환경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톰과 나는 서울 충무로 애견센터에서 왔다. 주인은 나를 만나던 날 애견센터를 돌며 한밤중까지 환한 그 세계의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며 귀여운 강아지를 찾았던 시간을 지우고 싶다고 언젠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면 나는 좀 섭섭하다. 동물공장의 악행에 일조한 그 순간이 후회는 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나를 만나지 못했을 것 아닌가. 개들은 한번 가족이 된 사람에게는 온 마음을 다 준다. 주인도 다른 생각 않고 온 마음으로 나를 대해주면 좋겠다. 개의 생은 인간의 그것보다 짧으므로, 우리가 앞으로 함께할 시간을 좋은 마음으로 채우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나의 일상을 얘기하자면, 만세와 마찬가지로 주로 자거나 먹거나. 만세가 하루 20시간쯤 잔다고 하는데 나는 18시간쯤 자는 것 같다. 요즘은 해가 길어져서 베란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오후 햇살이 베란다에 길게 들어올 때, 따뜻한 바닥을 찾아 낮잠 자는 걸 좋아한다. 검은 등판이 따끈따끈 열이 오를 때까지, 우리는 인간들과 반대로 엎드려 등을 지진다. 이런, 좀 있으면 해가 떨어지겠다. 남은 햇살 싹싹 긁어 쓰러 가야지. 그럼 나는 만세의 다음 목욕 시간에 다시 돌아오겠다. 그때까지 안녕!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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