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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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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시간

멍때림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우리가 왔다네
등록 2016-08-24 22:05 수정 2020-05-03 04:28
마지막 원고를 쓰는 동안에도 식탁에 앉아 함께 마감하는 만세. 신소윤 기자

마지막 원고를 쓰는 동안에도 식탁에 앉아 함께 마감하는 만세. 신소윤 기자

내 이름은 만세, 고양이다.

개, 고양이들의 줄초상이 이어지는 계절이다. 얼마 전 말복을 넘겼으니 올여름에도 세 번 대살육의 날이 끝났다.

나는 육식 고양이. 어떤 고양이들은 상추도 뜯어먹고 오이도 씹어먹는다고 하는데, 나는 오로지 고기만 먹는다. 오리육포, 닭가슴살, 소고기맛 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다. 고기 맛에 길들여진 나는 육식하는 인간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고양이들이 그래왔듯, 인간도 아주 오래전부터 남의 살과 피를 얻어 생명을 이어온 길고 긴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리 형님이랑 나는 육포를 씹다가 종종 이런 얘기를 할 때가 있다. “우리 이거 너무 쉽게 먹는 것 같지 않아?” 집 안에서 길러져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사냥도 기다림도 없이 우리는 주인이 마음 내킬 때면 언제든 고기를 먹을 수 있다. 냉장고 문만 열면 나오는 고기 가공식품들.

나는 인간들이 고기를 안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고기를 쉽게 먹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마트에서 3천원도 안 하는 가격에 팔리는 삼계탕용 닭 한 마리, 싸다며 무턱대고 장바구니에 집어넣지 않고 이 닭이 왜 이렇게 싼지 한번쯤 생각해보면 좋겠다. 돼지가 고기가 되기 위해 왜 옴짝달싹 못하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개고기를 먹는 것이 불법은 아니지만(그렇다고 합법도 아니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식탁까지 오는지 한번쯤 생각해보면 좋겠다. 대량화된 피와 살육의 시간 사이에 묻힌 비명과 고통에 눈감지 않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마음이라면, 지금보다는 덜 쉽게, 덜 잔혹하게 고기를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내 생각을 둔감한 주인이 간파했을 리 없으련만, 어쩐 일인지 얼마 전부터 채식 잡지를 구독하기 시작했다. 다달이 잡지가 올 때마다 부지런히 읽는 모습을 보고 제리 형님과 나는 두 가지 마음이 교차했다. ‘동물을 먹지 않겠다고? 웰컴!’ ‘그런데, 그럼 우리 육포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주인은 꼼꼼히 책을 본 다음 변함없이 고기를 구워먹고 볶아먹고 삶아먹으며 지낸다. 우리의 오리육포도 냉동실 한쪽에 여전히 잘 저장돼 있다.

지난 1년6개월 동안 고양이의 눈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봤다. 고양이들은 대부분의 시간 잠을 자고 나머지 시간 동안 장난치고 멍때리며 보낸다. 인간들은 시간을 쪼개 쓰며 단순한 일을 복잡하게, 복잡한 일은 더 복잡하게 만들며 사는 것 같다. 고기를 대량생산하고 소비하는 것도 아마 그런 복잡한 시간들이 쌓여서 생긴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나의 대필 작가, 집주인의 일은 오늘로 끝이다. 새벽에 주인이 식탁 의자에 앉아 원고를 쓰다가 맞은편 의자에 다리를 걸치면 발바닥에 오동통하고 푹신한 내 몸이 닿곤 했다. 그 시간 유일하게 안 자고 곁에 있는 존재를, 주인은 식탁 아래로 몸을 내려 바라보곤 했다. 이른바 ‘고양이 시간’. 마감에 쫓겨 체증에 걸릴 것처럼 아침을 맞다가도 잠깐 쉬며 소화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런 멍때림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고양이가 인간 세상에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까 모를까.

신소윤 기자yoon@hani.co.kr
<font color="#991900">※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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