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만세, 고양이다.
지금부터 호흡을 멈추어야 한다. 내 옆에 널려 있는 인형들과 나는 같은 존재인 것이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그의 손아귀에 걸려들고 말 것이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커튼 자락이 내 맘을 흔든다. 창가에 누워 일렁이는 커튼 끝을 붙잡으며 놀고 싶다. 하지만 움직이지 말 것. 누가 내 이야기를 하는지 귀가 간질거려도 참아야 한다. 움찔거리지 말 것. 눈동자도 굴리지 말 것. 제리 형님이 내 장난감을 물고 태연하게 지나간다. 안 돼! 그래도 달려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다가온다, 그분이 다가온다.
진격의 아기가 걷기 시작했다. 네 발로 기던 아기가 며칠 엉덩이를 들썩이더니 바닥을 짚던 두 손을 허공에서 흔들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나는 갈 곳을 잃었다. 아기는 바닥에 엎드려 있을 때보다 시야가 훨씬 넓어졌다. 몸을 일으켜서 주변을 한 바퀴 휘 둘러본다. 뚜뚜뚜뚜… 레이더망에 목표물이 포착되면 쫓아온다, 끝까지. 이럴 땐 나의 푹 퍼진 몸이 원망스럽다. 집주인 손바닥만 한 너비로 열린 베란다 문이 아쉽다. 고양이는 아무리 좁은 구멍이라도 머리만 들어가면 다 지나갈 수 있다고 누가 말했나. 고양이도 뚱뚱하면 제아무리 날렵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괜히 들이밀었다가 머리만 처박고 버둥거릴 것이 뻔하다. 나는 우아하고 고상한 고양이므로 그렇게 빠지는 모양새로 이 난관을 회피하진 않을 거다. 차라리 인형들 틈에 섞여 털북숭이 인형인 척하는 것이다. 꼿꼿하게 앉아 파도처럼 밀려오는 아기의 공격에 맞서보자. 그래, 내 목을 쳐라.
일어서 걷기 시작한 아기는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집주인도 바빠졌다. 엎드려서는 손에 닿지 않던 울타리 문고리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현관과 거실 사이에 둘러친 울타리 밖에는 제리 형님과 내 화장실, 집주인들의 화장실, 신발이 널려 있는 현관까지 아기의 저지레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 천지다. 신세계가 펼쳐진 그 공간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집주인이 방심한 틈을 타 아기는 결국 문을 열고 탈출을 시도했다.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을 쫓아와서 지붕을 팡팡 두드리고 제리 형님의 화장실에 손을 대려던 순간 집주인에게 소환당했다. 화장실도 맘 졸이며 써야 하는 이 불행한 시국이여.
무엇이든 과하면 모자라니만 못한 것이다. 과한 사랑도 그렇다. 이 아기는 나를 너무 사랑한다. 한번 붙들면 놓치지 않는 하이에나처럼 끈덕지게 나에게 따라붙는다. 좋아하는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 내 털을 마구 쥐어 뽑는다. 백허그, 그런 건 나에게 안 해도 된다. 엎드려 평화롭게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덮치고 그러지 마라. 아가, 이 시대에 그런 사랑은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아.
가족 관계에서도 포지셔닝이 중요하다. 약삭빠른 제리 형님은 아기에게 늘 두드려 맞다가도 가끔 아기가 손에 쥐고 흔드는 과자며 과일을 뺏어먹으면서 자기가 만만치 않은 존재임을 인식시켰다. 아기는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음식, 가령 고구마 말린 것이나 옥수수 같은 것을 먹을 때는 제리 형님을 피해서 먹는다. 이건 그때만큼은 아기가 제리 형님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와 아기 사이에는 실랑이를 할 여지가 아무것도 없다.
아기가 언제 가장 예쁘냐고 물을 때, 인간들은 잘 때가 가장 예쁘다고 하던데 나도 그렇다. 아기가 잠들었을 때 밀물처럼 밀려와 온 집 안 구석구석 깃드는 그 고요, 그 평화. 더 이상 인형인 척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옆에 가서 슬쩍 몸을 기대봐도 내 머리와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지 않는 토실토실한 작은 손. 이 여름 해는 왜 이렇게 긴가. 밤은 언제 오나.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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