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만세, 고양이다.
가을, 베란다 창에 걸린 하늘 색이 예사롭지 않다. 하늘은 높고 고양이는 살찌는 계절이다. 인간들은 아프며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 서늘한 바람에 몸살을 앓거나 마음 깊이 넣어뒀던 옛 연인의 이름을 충동적으로 떠올리며 가슴앓이를 하거나. 그렇게 열꽃이 만개하고 농익은 추억이 파편처럼 흩어지고 나면, 몸은 찬 공기에 적응하고 추억도 얼어붙어버린다.
모든 게 절정으로 익어 마침내 사그라지는 계절. 우리도 무언가를 버리고 또 얻으면서 새 시간을 준비한다. 그렇다. 우리의 계절맞이는 다름 아닌 털갈이와 함께 시작된다. 다니는 걸음걸음 털이 빠지는 걸 보니 이미 가을인가보다. 봄·여름을 무사히 나게 해주었던 긴 털이 빠지고, 가을·겨울 서늘한 기운이 뼈 사이로 스며들지 않게 짧고 촘촘한 털이 올라온다.
새 털옷을 입고 캣타워에 앉아 창밖을 본다. 여름엔 제발 좀 치대지 말라며 멀찍이 떨어져 걷던 중년의 부부들도 다정히 손을 잡고 동네 냇가를 걷는 계절. 인간들에게 가을이란 왼팔이든 오른팔이든 누구 옆구리에 딱 붙이고 걷고 싶은 그런 계절인가보다.
이맘때 인간들이 사랑에 빠져드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 고양이들이 남긴 이런 말 때문일 거다. 나쓰메 소세키가 쓴 에 나오는 고양이 형님은 이렇게 말했다. “무릇 연애란 우주적인 활력이다.” 쓸쓸하고 스산한 계절, 우리는 겨울잠에 빠져드는 대신 사랑함으로써 생기 있게 움직이는 것이다.
고양이는 연애를 하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한다. 내 나이 만 5살. 인간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신체 나이 36살. 고양이 관련 서적에서는 3~6살을 ‘프라임 타임’이라고 표현한다. 프라임 타임을 1년 남겨둔 지금까지, 한 번도 연애를 하지 않았다. 인간들처럼 인생 게임에서 스테이지 클리어 하듯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뭐랄까, 매일의 할 일과 목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인 나날이 좀 지겹다. 사실 나갈 핑계를 좀 만들고 싶기도 하다. 오늘도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느라 지친 몸을 좀 누이고 겨우 쉬고 있는데, 이때를 놓칠세라 이 집에 사는 꼬마가 쫓아왔다. 제발 나를 빨래 취급하지 마라. 그만 비비고 주물라고. 한시도 나를 놓으려 하지 않는 이 맹목적인 사랑에서 벗어나고 싶다. 감정을 나누고 사랑을 주고받고 싶다. 나도 ‘우주적 활력’이란 것을 좀 얻고 싶다.
요즘 인간들은 소개팅 나가기 전에 상대방의 프로필을 훑고 모바일 메신저 ‘프사’(프로필 사진)를 먼저 확인한다더라. 나는 그런 게 없으니 이 지면을 빌려서 좀…. 이거 영 떨떠름하긴 한데, 의 형님이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으므로. “얻기 힘든 기회는 모든 동물로 하여금 내키지 않는 일도 굳이 하게 한다.”
이름 만세, 만 5살. 중성화 수컷 고양이. 하얀 털, 체격 좋은 편(집주인이 자꾸만 뚱뚱한 편이라고 솔직히 쓰라는데, 이런 건 적당히 포장해 쓰는 거 아닙니까?). 활발하고 애교가 많은 코리안쇼트헤어와 활동적이고 성품이 태평한 터키시앙고라의 성격이 반씩 섞였다. 터키시앙고라는 개와도 잘 지낼 정도로 적응력이 좋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치와와 제리 형님과 아주 잘 지내고 있다. 그렇다고 종을 넘은 연애를 하겠다는 것은 아님. 그냥 한갓지게 살랑이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세상 구경하고 가끔 밤사냥을 함께 할 연인이자 동지이자 친구 구함.
집주인한테 오는 길에 바바리코트나 한 벌 사오라고 주문해야겠다. 출렁이는 뱃살 야무지게 쑤셔넣고 칼라 깃 세워서 소개팅 좀 나가보게. 나의 가을이여 찬란하길.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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