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만세, 고양이다.
생애 가장 싫은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목욕과 병원에 가는 일이라고 하겠다. 목욕은 처음부터 싫었다. 털 안으로 축축하게 젖어오는 그 느낌이 불쾌하고 ‘쏴’ 하고 쏟아지는 물소리가 공포스럽다.
병원에 가는 일을 싫어하기 시작한 것은 두 살 무렵이었다. 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식욕이 없었다. 만 이틀을 채우고 나니 주인들이 걱정했다. 고양이는 예민한 동물이라 굶는 시간이 길어지면 장기에 손상이 온다는 둥 무서운 얘기까지 어디서 잔뜩 듣고 와서는 수선을 피웠다. 평소와 다름없이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자면서 보내고 있었는데 주인들은 갑자기 잠을 많이 자는 것 같다, 쳐진 것 같다, 숨 쉬는지 확인해보라는 둥 호들갑이었다.
단식의 나날은 하루하루 연장됐고 동네 병원에서는 문제를 찾지 못하겠다며 엑스레이를 찍네, 초음파를 해보네 하며 나를 더욱 괴롭혔다. 사진을 찍는다며 팔다리를 억지로 누르고, 나를 보자기 펼치듯 양쪽에서 붙들고 길게 늘였다. 그때부터였다. 병원에서 하악질(고양이가 경계하는 대상에게 보이는 위협의 표현)을 하기 시작한 것은.
맨날 뚱뚱하다 그래서 나도 좀 굶어봤는데, 왜 이 난리냔 말인가. 만 엿새째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유를 찾지 못했던 식욕 부진은 이렇게 유야무야 해결됐다.
그 소동 이후 나의 건강 비결을 물으신다면 병원에 가기 싫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성실하고 꿋꿋하게 병원에 갈 일을 만들지 않으며 살고 있는데, 얼마 전 예상치 못한 곳에 문제가 발생했다.
집주인이 오랜만에 내 턱을 문질문질하며 쓰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뭐지. 손끝에 느껴지는 불쾌한 감촉은. 그렇게 들켰다, 숨겨왔던 왕여드름을. 직경 0.5cm, 몸의 비례로 따지자면 사람 얼굴에 주먹만 한 여드름이 난 셈이다. 주인이 면포에 따뜻한 물을 적셔서 털에 엉겨붙은 피지를 닦아줬다. 뭉쳐 있던 지저분한 것들이 닦여나가면서 털도 한 움큼 빠졌다. 볼품없이 뻥 뚫린 내 턱을 보고 여기저기 털을 헤집던 주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엉망진창이네.”
그때부터 나는 조급해졌다. 이대로 있다간 병원에 끌려갈지도 모른다. 부지런히 그루밍을 하며 턱에 난 여드름 흔적을 없애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빨갛게 변한 피부는 내 마음과 달리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집주인 내외와 병원을 찾았다. 선생님이 손전등을 비추며 내 얼굴을 살폈다. 나를 붙들고 얼굴에 불빛을 마구잡이로 쏘아대니 나는 거의 패닉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한테 하악질을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왜 내게 이런 시련이 닥쳤나이까. 귀를 쫑긋 세우고 선생님의 진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심 기대했다. 인간들이 늘 병원에 가서 듣는다는 “스트레스 때문입니다”라는 진단이 내려지진 않을까. 나는 내 스트레스의 원인이 무엇인지 동짓날 기나긴 밤 다가도록 굽이굽이 펼쳐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함께 사는 아기의 지나친 애정 표현, 제리 형님의 무심함, 다이어트를 이유로 제한되는 간식, 그럼에도 빠지지 않는 뱃살, 의자 천 뜯지 마라, 욕실 바닥에 고인 물 먹지 말라는 주인들의 잔소리….
하지만 선생님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집에서 사료 먹는 고양이에게 종종 발생하는 피부병이라고 설명했다. 사료의 기름기가 그릇에 남아 턱에 묻으면서 모공에 기름이 끼고 공기를 만나 산화하면서 검은 여드름이 유발되는데, 다른 곳을 열심히 그루밍하더라도 턱까지 신경 쓰지 못하는 고양이의 경우 이러기도 한다고.
소독약과 연고를 처방해준 선생님은 깨끗하게 관리하기 위해 턱에 난 털을 좀 깎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럼 고양이가 좀 못생겨 보일 텐데 괜찮으세요?” 집주인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집에만 있는데요, 뭐.”
이러니 내가 스트레스를 받아, 안 받아? 턱에 난 여드름이 더 욱신거렸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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