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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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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분다

큰 바람이 지나간 것처럼 초토화된 집안, 인간들은 왜 어지럽히고 치우는 일을 반복할까
등록 2015-11-19 11:57 수정 2020-05-02 19:28

내 이름은 만세, 고양이다.
우리 집에는 태풍 1, 2, 3호가 있다. 덩치가 작은 순서대로 파괴력이 크다.
1호 태풍이 지나간다. 목표가 정해지면 서슴없다. 첫 번째 목표물은 장난감통이었나보다. 힘껏 제 몸집만 한 상자를 거꾸로 들어 안에 든 모든 것을 쏟아버린다. 단정하게 꽂혀 있는 책을 모두 뽑는다. 서랍을 열고 거기에 들어 있는 모든 옷을 꺼낸다. 종이가 손에 잡히면 찢는다. 색연필이 손에 잡히면 바닥에 그린다. 밥 먹다가 지루해지면 농부가 씨를 뿌리듯 음식을 온 바닥에 골고루 던진다. 곧 부엌에서 배와 사과와 호박과 벼가 싹을 틔울 것만 같다. 밤의 고요가 찾아오면 우유통은 장난감 바구니에, 과자 부스러기는 책꽂이에, 옷장을 탈출한 양말 꾸러미는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다. 태풍 1호는 이렇게, 가구와 방, 장난감과 살림살이 등 모든 것의 경계를 흩트려놓는다. “낸내 가까(자러 갈까)?” 태풍 매미 버금가도록 세상을 휘몰아치다 드디어 잠잠해진다는 신호를 보낸다.
태풍 1호가 끝없이 저지레를 하는 데 자양분을 공급하는 이가 있다. 태풍 1호의 엄마, 태풍 2호다. 밤이 내려앉으면 한숨을 내쉬며 1호가 어지럽힌 세상을 바라본다. 정리에 앞서 태풍 2호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칼을 뽑아든다. 칼을 뽑았으면 뭘 해야 하나. 무라도 썰어야 한다. 아닌 밤중에 도마를 두드린다. 부엌 수납장에서 냄비를 꺼낸다. 냉장고에서 다시마와 멸치를 꺼내 물에 우린다. 어제 마트에서 사온 굴을 소금물에 흔들어 씻는다. 습습, 간을 보며 국을 끓인다. 들깻가루 털어넣고 버섯 볶고, 생선 한 토막도 구워둔다. 태풍 2호의 얼굴에, 아 뿌듯하다, 내일 아이가 잘 먹겠지, 하는 표정이 어른거린다. 가슴이 벅찬 나머지 설거지는 잊고 만다. 그러니까 태풍 2호는 주로 부엌 지역을 집중 공략한다. 태풍 3호가 등장할 시간이다.
두 차례의 폭격이 지나간 거실과 부엌에서 태풍 3호는 어쩌면 울고 싶을지도 모른다. 모두 잠든 뒤에 태풍 3호의 활동이 시작된다.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처럼 허리를 숙이고 장난감을 줍기 시작한다. 거실 한쪽에 켜둔 아련한 불빛만이 굽은 그의 등을 토닥인다. 거실 재건 사업을 끝내고 부엌으로 고개를 돌리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맥주가 그를 구원할지니 집에 맥주가 떨어지는 날 없도록 늘 애쓰는 태풍 2호가 이 순간만은 고맙다. 이렇게 태풍 3호는 복구에 열심인 듯하지만 태풍 1·2호가 휩쓸고 간 자리를 수습하고 나면 그도 힘을 잃고 만다. 빈 맥주캔과 대충 벗어놓은 양말 같은 것을 여기저기 널어놓고 잠자리에 든다. 태풍 2호는 태풍 3호의 찜찜한 뒷정리가 내심 불만이지만 자기는 카오스인 주제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침부터 밤까지, 나는 주로 소파 아래 누워서, 식탁 의자에 몸을 기대고, 캣타워에 올라 앉아서 이 모든 장면들을 바라본다. 고양이가 가만 앉아 있다 폭, 한숨을 쉬는 순간이 있다. 인간들의 정신없는 일상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다. 인간들은 왜 늘 이렇게 주변을 어지럽히며 사는 걸까. 어차피 정리해야 할 물건들 제자리를 잃고 떠돌게 할까. 시야를 넓혀 보면 집 안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을 헝클고 부수고 치우고 개비하는 것을 반복하는 게 인간들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방법인 것 같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우리보다 기록할 것이 많아지긴 하겠지만 고양이인 나는 잘 모르겠다. 정물화 같은 일상을 보내는 것이 묘생 최고의 낙인 우리는, 이 별에서 조용히 머물다 가는 것이 태어난 이유이자 목표다. 매일 새로운 일을 저지르고 또 수습하는 인간들을 이해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태풍이 지나가고 페허가 된 거실에서도 고양이는 어떻게든 누울 곳을 찾는다. 신소윤 기자

태풍이 지나가고 페허가 된 거실에서도 고양이는 어떻게든 누울 곳을 찾는다. 신소윤 기자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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