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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좀 내버려둬

어디선가 다가오는 짧고 통통한 그림자… 아기의 ‘와락’ 공격에 복수의 날을 세워보지만
등록 2016-06-03 10:58 수정 2020-05-03 04:28
신소윤 기자

신소윤 기자

내 이름은 만세, 고양이다.

고양이들이 앞발 두 개를 가지런히 접어 가슴팍에 묻고 뒷발도 모아 배 아래 깔고 웅크린 자세를 ‘식빵 굽는다’고 말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꼭 통통하게 잘 구워진 식빵처럼 반듯하기 때문이다. 봄볕이 내리쬐는 따뜻한 베란다나 커튼 뒤 아늑한 공간에서 이렇게 옹그려 앉아 있곤 한다. 주로 눈을 감고.

인간들은 우리가 할 일 없이 졸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식빵을 구우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거다. 예를 들면 세계 평화와 고양이의 역할이라든지, 한국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고양이의 자세라든지. 그렇게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콧수염을 잡아당겨도 모를 만큼 깊은 숙면의 세계에 다다르게 된다. 꿈나라, 그곳에서 우리 고양이들은 세계 평화와 경제위기의 해법을 찾아보려 한다. 없으면 말고.

그런데 해법의 근처에 거의 다다를 즈음 꼭 잠에서 깨고 만다. 나는 요즘 뒤가 두려운 고양이다. 내가 식빵만 굽고 있으면 어디선가 짧고 통통한 그림자가 나타난다. 앞으로 달려나갈까 말까, 고민할 새 없이 그림자는 실체가 되어 내 등을 덮친다. 고양이보다 날래고 새털보다 백배 천배쯤 무겁다. 주인이 키우는 아이가 나를 와락 끌어안고 머리를 등에 대고 비비댄다.

제리 형님이 똑같은 자세로 바닥에 엎드려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유독 나에게만 이런다. 이 아이는 아무래도 나를 움직이는 털 뭉치로 취급하는 것 같다. 인간의 말을 배운다면 아이에게 이 말을 가장 먼저 하고 싶다. “무겁다, 날 좀 내버려둬!”

나는 결초보은하는 고양이이므로 아이가 그토록 나를 사랑한다면 나도 그 사랑을 꼭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이 지면에 ‘새벽의 기습’에 대해 짧게 쓴 것이 있다. 아이를 새벽형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 매일 새벽 4시30분쯤 아이 곁에 가서 잠을 깨운다는 얘기였다. 사실 그때 쓴 말은 뻥이다. 새벽형 인간이 웬 말인가. 본격적으로 내가 사랑을 되갚는 시간이다.

앞발로 툭툭, 곤하게 자는 아이 얼굴을 건드리고, 보드라운 볼에 나의 거친 털을 마구 비비댄다. 아이가 덮고 있는 이불에 ‘꾹꾹이’(고양이들이 엄마 젖 먹을 때 하는 행동으로 성묘가 되어서도 무의식중에 앞발을 푹신한 물건에 대고 교대로 움직이는 행위)를 한다. 가만히 앉아 아이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을 걸어본다. “야옹(야, 일어나라), 야아옹(낮에 날 그렇게 괴롭혀놓고 잠이 오냐, 너도 좀 당해봐라).”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실패다. 너무 떠들어대다가 주인에게 들켜 쫓겨나기 일쑤다.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아이의 겨드랑이에 코를 박고 같이 잠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러다 정들겠네. 실패한 복수의 밤이 쌓여만 간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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