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말하지 못하였다. 1987년의 이한열(1966~87)을, 그는 말하지 못하였다. 경찰이 싸지른 SY44 최루탄에 맞아 이한열은 27일간 사경을 헤매다 7월5일 새벽 숨졌다. 그도 중환자실 이한열의 바로 옆 침상에 누워 있었다. “나는 한열이를 못 봤는데, 한열이 어머니(배은심)가 들어오셔서 옆에 한열이가 있다고….”
그 또한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았다. 뇌수술을 2차례 했다. 그는 21일간 입원했다. 퇴원 예정일은 7월5일. 그날 새벽 이한열이 돌아갔다. 이 대목에서, 그는 더 말하지 못하였다. 얼굴이 순간 무너졌다. 기자는 더 묻지 못하였다.
닷새 뒤 7월9일 이한열 영결식. 문익환(1918~94) 목사가 정권에 희생된 열사들 이름을 하나씩 호명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부르는 절창이었다.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이 단상에 올랐다. 예정에 없던 순서. “전두환 노태우 살인마. 살인마 살인마 살인마. 살인마는 물러가라, 살인마는 물러가라. 한열아 한열아… 이 많은 애국청년들이 네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줄게. 안 되면 엄마가 갚으련다.” 통곡이 한반도를 울렸다. 그날 그는 퇴원했다.
‘한열이’ 떠나는 날 퇴원이종창(50). 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을 뒤에서 부축하며 세상을 응시하던 한 장의 사진. 6월항쟁의 상징이 된 사진 속 그 사람. 그는 당시 연세대 도서관학과 2학년이었다. 대학 졸업 뒤 노동운동에 2년 남짓 투신했다. “잘하지 못했어요.” 모교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말을 듣고 1993년 대학도서관 직원이 됐다. 그리고 20여 년. 해마다 6월이 되면 기자들은 그를 찾았고, 그에게 이한열을 물었다. 그는 되도록 피했다. 그에게 1987년 6월은 머리에 박힌 파편과 다르지 않다. 그는 고통스럽다고 했다. 기자는 더 묻지 않았다. 지난해 그는 뇌 정밀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괜찮단다.
누리고 어우러지고, 구산동도서관마을그는 말하였다. 지식정보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 도서관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책으로 누리고 정보로 어우러지는 열린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고. 그 공동체가 바로 그가 관장으로 있는 서울 은평구 구립 구산동도서관마을( www.gsvlib.or.kr)이다. 예의 무슨무슨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아니고 ‘마을’을 덧붙인 데서 이곳이 예사 도서관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은 2015년 11월13일 개관했다(우연일 테지만 11월13일은 전태일이 분신한 날이다). 주민이 주도했다. 2006년 ‘우리들의 도서관’을 꿈꾼 주민들이 모여 도서관 건립을 위한 주민청원에 나섰다. 열흘 남짓 만에 2천 명이 모였다. 2008년 은평구에서는 지금의 도서관 터를 사들였다. 그러고도 4년이 더 걸렸다. 2012년 서울시 주민참여예산 사업으로 선정돼 예산 24억원을 얻어냈다.
2015년 8월. 이종창 관장은 때마침 모교에 사직서를 낸 뒤 쉬고 있었다. “연대 도서관에서 근무하다가 이런저런 사연 때문에 사표를 낸 상태였다. 대학도서관에 있으면서도 공공도서관에서 일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도서관 근무 경험을 가지고 공공도서관 활성화에 기여해보고 싶었다. 마침 구산동도서관마을 관장 공모가 나서 지원서를 냈다.” 이 관장의 임기는 3년이다. 도서관 유치에 앞장선 지역 단체들이 모인 은평도서관마을협동조합이 구로부터 위탁받은 운영 기간과 같다.
주민 손으로 주택 개조해 세운 도서관구산동도서관마을은 신축 건물이 아니다. 도서관 터는 다가구주택 8곳이 밀집해 있던 곳. 이 가운데 주택 3채를 허물지 않고 리모델링했다. 건물 외벽의 수십 개 정방형 창문은 책이야말로 인간이 세상을 보는 창이라는 걸 은유하는 듯 보인다.
내부 공간도 일반 도서관과 천지차이. 오밀조밀 아기자기한 방이 50개가 넘는다. 종합자료실, 마을·어린이·청소년자료실에 층마다 ‘만화의 숲’도 있다. 5층 건물 곳곳이 흡사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가는 미로 같다. 그 미로는 인간이 책에서 지식을 얻고 지혜를 길어올리는 길일 것이다.
6월의 첫날. 오전 시간인데도 알록달록 차려입은 유치원생들이 아장아장 줄지어 도서관을 누비고 있었다. 구석구석 터를 잡고 공부하는 청소년들도 보인다. 허황하리만치 큰 책상에 공무원 수험서적이 널브러진 풍경은 찾아볼 수 없다.
개관 초기, 일반열람실이 왜 없느냐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 관장의 말. “일반열람실을 두지 않은 것은 우리 도서관이 책 바로 옆에서 개인 공부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도서관에서 대출 권수가 많이 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여기서 책을 읽는 게 더 좋다는 반응이 많다. 아늑한 주택 구조이다보니 개인 서재 분위기도 나고…. 책 읽기에 좋은 환경이다.”
책 배치도 예사롭지 않다. 흔히 도서관은 한국십진분류표(KDC)에 따라 책을 배열한다. 사전과 같은 총류(0)부터 문학(9)에 이르기까지 책의 가짓수를 크게 열 가지로 나누는 방법이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은 이 분류법에 더해 ‘테마 컬렉션’을 함께 운용한다. 전문사서가 주제에 맞춰 책을 선정해 시민들에게 추천하는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때는 ‘대통령과 민주주의’, 프랑스 파리 연쇄테러 사건 즈음엔 ‘테러리즘’을 주제로 잡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도서관 건물과 책이 있고 대출·반납만 하면 된다는 사회적 인식이 여전히 있다. 살아 있는 도서관의 기능은 대출·반납이 아니라 이용자에게 지식정보를 연결해주는 프로그램, 그리고 교육·지원 역할이다. 여전히 도서관 운영의 전문성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연유로 이 관장은 사서의 역할을 줄곧 강조했다. 그 자신도 사서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구산동도서관마을에는 사서 21명이 일한다. 다른 공공도서관들에 견줘 조금 많은 수준. “사서는 지식정보와 이용자를 매개해주는 역할을 한다. 사서 자신도 책을 많이 읽어야 하지만 시민들이 책을 많이 읽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엔 사서의 중요한 역할이 매일 신문 스크랩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서가 출근해서는 신문 보며 논다고 생각하곤 했다. 사회적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
민주주의, 책 그리고 도서관구산동도서관마을 1층 들머리 오른편. 지난 1월 타계한 신영복의 휘호가 벽에 걸려 있다. ‘서삼독’(書三讀). 신영복은 이렇게 풀어 말했다. “책을 반드시 세 번 읽어야 합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끊임없는 탈주(脫走)’로서 독서는 곧 자신과 시대를 읽고 반추하고 전망하는 행위다. 책이 민주주의와 접선하는 지점. 이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리영희·1977)이란 책이 있다. 대학생 때 이 책을 보면서 생각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인식이 중요하다. 행동이 나오려면 인식이 있어야 한다. 물론 행동이 인식을 바꾸기도 한다. 사람이 제대로 인식을 갖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매체이자 도구가 바로 책이다. 미국 도서관 역사를 보면, 지역 주민들이 도서관을 건립해달라고 국가에 요구하는 활동을 많이 했다. 민주시민 교육의 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서…. 합리적이지 않은 책은 사회에 나오기 힘들다. 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들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의 검증·합의가 된 것들이다. 우상이나 편견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민주주의가 발전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편견과 우상을 최소화하고 이성과 토론,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같이 살아간다는 가치를 느끼고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도서관은 매우 중요하다. 대학생 때부터 가졌던 생각이다.”
이 관장은 전남 영광에서 나고 자랐다. 초등학교 5학년이 돼서야 집에 전깃불이 들어왔단다. 집에는 책이 없었다. 중학생 때 먼 친척이 보내준 15권짜리 세계위인전집이 그가 기억하는 ‘독서의 윗목’이다. 광주로 고교 진학을 해서는 그 시절 또래들처럼 입시 공부에만 매달렸다. 대입학력고사를 치른 뒤 진로를 고민하던 차 도서관학과라는 게 눈에 들어왔다. “평생 책 속에 있으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듭 그는 말하였다. 도서관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도서관은 독서실이 아니라고. “지식정보는 살아가는 데 필수다. 도서관에서 다 주지는 못하지만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정보를 도서관에서 줄 수 있다. 사서가 중요한 것은 누군가 어렵게 책으로 정리해놓았는데 이용자는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걸 매개해주는 게 사서의 역할이다. 우리 도서관의 첫인상이 바로 사서다. 밝고 친절하고 따뜻하고 신바람이 나 있는 것 같다는 칭찬을 자주 받는다. 이들의 열정이 큰 힘이 된다. 지금까지 도서관 투자가 하드웨어 위주였다면 이제는 인력과 장서 쪽으로 국가에서 투자를 많이 해주길 바란다.”
한 권의 책이 세상 바꾸는 원천‘애국청년’ 이종창은 말하였다. 한 권의 책은 삶의 변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원천이라고. “책 한 권에는 많은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가 녹아 있다. 책을 통해 나의 삶을 꿈꿀 수 있다. 소중한 인류 문화유산이다. 나의 인생의 책은 이다. 요즘도 힘들 때 자주 꺼내본다.”
파렴치한 정권의 최루탄에 그가 쓰러진 자리. 피격 지점을 알리는 동판(사진)이 6월9일 드디어 땅에 박힌다. 정확한 설치 지점은 연세대 정문 큰 기둥 2개 가운데 왼쪽 기둥 앞 바닥이다. 동판에 새겨진 글귀. “1987년 6월9일 오후 5시 당시 연세대 2학년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곳, 유월민주항쟁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날 추모문화제에서는 열사의 셋째누이 딸(성균관대 재학)이 친구들과 함께 삼촌을 기리는 노래 공연을 한다.
(사)이한열기념사업회( www.leememorial.or.kr)는 6월7일부터 서울 마포구 이한열기념관에서 ‘이한열 유물전-유월이 이야기하다’를 연다. 피 흘리는 이한열, 등 뒤에서 그를 부축한 이종창의 사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던 일명 ‘한열이를 살려내라!’ 판화의 원판이 시민들에게 전시된다. 최병수 작가가 1987년 6월11일 제작한 작품. 그동안 원판의 행방을 찾지 못하다 올해 초 성공회대 민주기념관에서 이경란 이한열기념관 관장이 우연히 발견했다. 이번 유물전에서는 어머니 배은심씨가 아들을 위해 손수 짜 입혔던 털조끼도 처음 공개된다. 한 기자가 취재 과정에서 빌린 뒤 28년 만에 되돌려준 이한열의 어린 시절 성적표도 역시 처음 세상에 나온다.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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