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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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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처럼

에세이집과 음반 낸 정새난슬씨와 아버지 정태춘씨 인터뷰
등록 2016-06-02 17:39 수정 2020-05-03 04:28

임자를 찾았다. 이 시와 데칼코마니 같은 사람. “옳지 최선의 꼴/ 지금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정현종 시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마지막 연)

정새난슬(35). 재능 있는 일러스트레이터였고 2013년 펑크밴드 보컬과 결혼. 2년 만에 이혼. 출산 뒤 우울증으로 극단까지 갔던 여성. 두 돌 지난 딸 서하를 키우는 싱글맘. 서른 살에 처음 기타를 잡았고 지난해 11월 디지털 음반(EP) 을 냈다. 최근 첫 에세이집 (콘텐츠하다 펴냄)와 같은 제목의 정규 1집 앨범(유니버설 발매)을 세상에 선보였다. 정씨는 가수 정태춘(62)·박은옥(59) 부부의 외동딸이다.

소살소살 비 내리던 5월24일 오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정태춘·정새난슬 부녀를 만났다. 나란히 검은빛 옷차림. 두 사람은 보물 같은 딸이자 선물 같은 손녀를 함께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온 참이었다. “꼭 2인1조로 가야 해서요. 곱게 차에 타지 않거든요. 오늘도 우산을 펴고 차에 타야 된다고 해서….” 정새난슬씨가 웃으며 말했다. 곁에 앉은 정태춘씨는 ‘할아버지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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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작가로 세상에 나서다 죽을 때까지 창작자로 살고 싶다고 했는데.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야지 작정하고 음악을 만드는 게 아니라 갑자기 쏟아져나온다. 뱉어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다.”

건전한 매력은 없어도 불온한 마력이 넘치는 여자로 살고 싶단 말도 했다.

“매력이란 건 다수가 원하는 미적 가치다. 나의 특이점을 감싸안아서, 단점까지도, 매력이 아닌 나의 마력이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게 썼다.”

본인 내면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성격인가.

“내성적인 다혈질이 맞는 것 같다.”(웃음)

모순으로 얼룩진 삶을 기록한 게 이번 책이라고 했는데.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살 때 캣맘을 3년 했다. 고양이 키우고부터 동물학대에 분개하면서도 돼지고기를 열심히 구워 먹는 모습 같은 여러 삶의 모순들이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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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한숨에 읽었다. 글을 깔끔하게 잘 쓰는 것 같다.

“난 전형적인 SNS 세대다. ‘싸이월드’ 일기장 없었으면 글 쓸 생각을 안 했을 거다. 내가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글에 있는 태도라고 본다. 이오덕 선생님의 ‘글쓰기는 똥 누기다’라는 말이 절대적인 모토다.”

마지막 독립군, 문제적 여자

정새난슬씨의 책 의 부제는 ‘문제적 여자의 파란만장 멘탈 성장기’다. 홈런을 맞을지언정 직구를 과감히 뿌리는 투수 같다. “자신이 통과한 삶과 욕망에 대해 솔직하고자 한 여성이 적어내려간 내면 일기”라는 게 자필 소개.

아버지 정태춘씨는 한국 음악계의 음유시인이자 자유의 상징이다. 첫 앨범 (1978)부터 유신정권은 노래를 훼손했다. 1996년 사실상 검열이었던 대중가요 사전심의제 폐지를 이끌어낼 때까지 노래는 그의 ‘무기’였다. 음악평론가 강헌이 “우리 대중음악의 마지막 독립군”이라고 부른 이유다. 그의 목소리는 지금도 굴참나무처럼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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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의 노래 가사는 시적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정태춘  “나는 가사를 쓰면서 문학적인 부분에 크게 충실했다고 말할 순 없다. 딸이 쓰는 산문을 보면 좀 놀랍다. ‘내 딸 같지 않네.’”(웃음)

‘자기 자신과 결혼하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정새난슬   “내가 한 말은 아니고…. 이혼하고 나서 우울하니까 좀 동기부여가 될 만한 영상을 찾아봤다. (TED Talks·지식 강연)에서 이혼 세 번 한 여성이 나오더라. 관계에 집착했던 이유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말. 지키기 어렵지만 누구한테나 해당되는 말인 것 같다. 나와의 결혼 서약을 지킬 것, 다른 관계에 몸을 던지기 전에….”

‘새난슬’(새로 태어난 슬기로운 아이)이라는 이름이 독특하다.

정태춘  “내가 지은 게 아니라 우리 형님이 지었다.”

정새난슬   “이름이 너무 특이해서 사람들이 아무도 안 까먹겠다고 하면서도 그다음에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

타투는 언제 처음 했나.

정새난슬   “스물여섯 살 겨울에 처음 했던 것 같다.”

정태춘 “어떤 무늬의 옷을 선택해 입는 것처럼 자기표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그건 그(딸)의 선택이다.”

음반에 ‘정태춘 색깔’은 없다
정새난슬(오른쪽)씨의 첫 정규 음반 <다 큰 여자>. 아버지 정태춘씨가 편곡 작업을 함께했다.

정새난슬(오른쪽)씨의 첫 정규 음반 <다 큰 여자>. 아버지 정태춘씨가 편곡 작업을 함께했다.

정새난슬씨는 앨범에 실린 11곡의 작사·작곡을 도맡았다. 장르로 치면 모던포크. 가사는 섬세하고 멜로디는 깔끔하다. 아버지 정씨는 이번 앨범의 편곡 작업을 딸과 같이 했다. ‘정태춘 색깔’은 찾을 수 없다. 두 사람의 5개월 남짓 공동작업은 수월치 않았다고 한다.

이번에 함께 음반 작업을 하면서 어땠는지.

정태춘 “우리 둘은 음악적으로 너무 다르다. 가능하면 새난슬이 원하는 음악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색깔은 아무것도 없이 하는 게 목표였다. 근데 그게 쉽지 않았다. 내 식으로 한 게 아닌데도 ‘이건 아버지 스타일이다’라고 단정지을 때는 많이 힘들었다. 내가 내 정서를 고집한 건 없다.”

정새난슬   “그건 아빠 생각이다. 한 사람이 가진 정서는 정말 확고하지 않나. 정서를 설명할 때도 서로 사전적 정의가 달랐다. ‘여기서 슬프게’라고 할 때 아빠와 내가 음악적으로 풀어내는 슬픔이 다르다. 아빠가 편곡한 걸 5초 들었는데도 알 것 같아서 ‘이건 싫다’ 하며 갈등이 있곤 했다.”

정태춘 “누군가가 원하는 음악을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는 건 너무 힘들다. 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가사도 내 취향대로 만들자는 게 아니라 좀 일반적인 어법으로 손봤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도 강력하게 거부하더라. 토씨 하나도 못 건드렸다.”(웃음)

또다시 음악 작업을 같이 할 계획인가.

정새난슬   “앞으로 다시는 같이 안 하기로 했다. (웃음) 아빠 노래로 같이 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예전에 아빠가 썼던 동요들을 딸 서하한테도 들려주고 싶다.”

이혼 뒤 삶이 많이 변화했을 것 같다.

정새난슬   “이혼이라는 게 ‘이별의 끝판왕’ 같은 느낌 아닌가. 물론 지난해엔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지나고 나니까 해방감 또한 어마어마했다. 누군가에게 감정적으로 매여 있지 않으니까 매혹당하는 기쁨도 없지만 감정적 소모가 없다는 게 이렇게 가뿐한데 그걸 모르고 관계에 매여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챕터(장)가 달라진 느낌이다.”

정태춘  “우리 부부도 새로운 인생 챕터에 들어갔다. 손녀라는 놀라운 선물도. 늘 떨어져만 살다가 같이 살게 되면서 딸을 통해 페미니즘도 공부하게 됐다. 적어도 서너 권은 정독했다.”

아기 엄마들 많이 읽어주었으면… 책 뒤에 보면 딸에게 쓴 글이 있다.

정태춘  “오늘 집에 ‘극부여살불’(克父如殺佛)이라는 글귀를 붙여놨다. 부처를 죽이듯이 아버지를 극복하라는 뜻으로. 딸한테는 과제가 두 가지 있다. 나(아버지)를 극복하는 길. 세상 사람들이 나의 색깔로 새난슬을 바라보는 시선을 극복하는 과정에 있다. 또 하나는, 나도 이제야 배운 거지만, ‘젠더’(생물학적 의미를 넘어 사회적 의미를 담은 성별) 문제다. 여성들이 겪고 있는 부당함, 부당한 편견, 그것으로 인한 감시와 폭력 시스템… 이것과 싸워야 하는 과제가 있는 거다.”

정새난슬   “엄마보다 아빠와 유대가 더 끈끈하다. 기질적 성향이 비슷한 점도 있다. 나에겐 아버지로서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요즘 ‘케이(K)저씨’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 아빠는 케이저씨가 아니라고 어디 가서든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늘 열려 있는 아버지는 오픈북 같다.”

정태춘  “과찬의 말씀.”(웃음)

싱글맘으로서 경제적 사정은 어떤가.

정새난슬   “경제적으로는 곤궁 그 자체다. 스스로 기생충이라고 생각할 정도니까.”

이 책을 꼭 읽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이 있다면.

정새난슬   “비슷한 또래의 아기 엄마들, 산후우울증이나 육아우울증으로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엄마들이 많이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당신만 그런 거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남편들이 ‘너만 왜 그리 유별나냐’고 하면 내 책을 던지면서 ‘이거 봐! 나보다 더한 여자도 있잖아’라고 말할 수 있게.”

정태춘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남자, 또는 여자에 대해 잘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는 나이 든 남자들도 읽어보면 시야가 열리지 않을까.”

정새난슬이  세상과  나누고픈  말


“우리는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이혼이 부끄러운 이유는, 두 사람이 얼마나 미숙하고 이기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혼이 다행스러운 이유는 이제야, 비로소, 겨우, 그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24쪽)
“자기 자신과 결혼하라. 젊을 때나 늙을 때나 건강하거나 아프거나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나는 나를 사랑하겠다’는 서약을 지킬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100쪽)
“나는 너를 변화시킬 이유도, 힘도 없어. 다만 내가 더 단단해지려 노력할 뿐이야. 혐오발언에 대응할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하며, 너 같은 사람들이 세워놓은 빨갱이 차벽을 넘을 궁리를 할 뿐이야.”(145쪽)
“사람들이 말하기 꺼리는 금기들을 깨려고 자살 시도나 이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금기가 돼선 안 되는 것들이었다. 우리는 마주치기 싫은 문제, 고통, 우울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 누군가가 도움을 청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 손을 잡아줄 수 있다.”(152쪽)
“함께하는 날들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것. 당신의 사소한 일상을 목격하고 열렬히 응원하며 우리에게 닥칠 문제들 투쟁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 내게는 그게 사랑이에요.”(165쪽)
“나 역시 규정에 갇히고 싶지 않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속이며 움츠린 채 살아가고 싶지도 않다. 다 큰 여자로서 큰 괄호 안에 단어들을 채워넣으며, 반대편 괄호를 닫지 않은 채 살고 싶다.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타인들에게 정의되고 특정한 방식으로 재단돼 그 어떤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적어도 나만은 나를 ‘무엇’이라고 한 가지 역할, 정체성으로 고정하지 않을 것이다.”(207쪽)
“‘가요계’는 은하계처럼 먼 단어, ‘검열받지 않는 영혼’이길 바랐던 아빠, 거실에 앉아 노래를 만들고 ‘어떠냐?’ 하며 내게 들려주던 아빠. 대물림을 했다면 아마도 ‘그러한 삶의 방식’일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멈추지 못하는 자들이 갖는 고유한 속성 말이다.”(221쪽)
“나는 아직 그를 제대로 이해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의 절망과 분노와 우울을, 그의 섬세한 상념과 의심 없는 직관과 대담한 언술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를 신뢰하고 지지한다. 나의 선생님이니까.”(아버지 정태춘이 딸에게, 280쪽)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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