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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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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의 맛

국물 자박한 김장김치, 바다 냄새 짙은 어청도 김치…
집집마다 다른 맛에 취하니 금세 한 통 바닥 드러내네
등록 2016-01-09 14:32 수정 2020-05-03 04:28

겨울이라 하기엔 아직 이른 11월 초순에 그녀는 김치 한 통을 들고 찾아왔다. 김장김치라고 말했다. 그녀의 고향은 충북의 어느 깊은 산골마을이어서 11월 초순이 되면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언다.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한 달 이상 앞서 김장을 담근다.
추운 산골마을의 김치답게 짜지 않고 삼삼했으며 젓갈이 덜 들어가 깔끔했다. 지역적 특징과 함께 개인적 입맛도 더해져 있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양념을 덜하고 국물이 자박한 김치를 좋아한다고 한다. 또한 배추 숨을 덜 죽인 아삭한 식감을 좋아해 소금에 절이는 시간을 짧게 한다고도 했다. 따라서 국물이 자박한 물김치처럼 보였다.

비슷한 레시피로 만들어도 김치는 한 가지 맛을 내지 않는다. 지역과 풍토, 사람의 성향에 따라 맛과 먹는 방법까지 달라진다. 한겨레 박미향 기자

비슷한 레시피로 만들어도 김치는 한 가지 맛을 내지 않는다. 지역과 풍토, 사람의 성향에 따라 맛과 먹는 방법까지 달라진다. 한겨레 박미향 기자

체면 내던져야 제맛인 에그 조의 무김치

그녀가 들고 온 김치를 먹다보니 어느덧 11월 하순이 되었는데 그 무렵 한 선배가 김치 한 통을 들고 가게로 찾아왔다. 선배의 처가에서 담근 김장김치였다. 선배의 처가 사람들은 전주에 거주하고 있지만 본디 완주군 고산면의 깊은 산골마을 사람들이다.

완주군 고산면은 진안군과 무주군, 장수군과 더불어 넓은 고원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라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지역이었다. 자연히 간고등어 한 마리, 새우젓 한입 맛보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이라 지금까지도 비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김치에 젓갈은 아주 조금만 넣고 소금으로만 간을 한다. 짭짤한 김장김치였지만 깔끔하고 시원해서 생김치로 먹기에 그만이었다. 누른고기에 싸서 막걸리 안주로 먹고 며칠간 밥반찬으로 먹었더니 금세 김치 한 통이 바닥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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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초순이 되자 첫눈이 모질게 내리고 여기저기 김장을 담그느라 북새통을 이뤘다. 그 무렵 가게 뒷마당에서도 김장김치를 담갔다. 이웃한 부동산에서 담근 김장이었는데 그들에게 고향을 묻지 않았어도 김치의 맛으로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부동산 사람들이 담근 김치의 맛은 전형적인 전주식이었다. 각종 양념을 푸짐하게 넣어 화려하게 김치를 담갔다.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배추 숨을 죽이고 국물이 배어나오지 않게 담그는 것도 전주 김치의 특징이다. 색과 맛과 향이 두루 조화를 이룬 고급스러운 맛이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이렇게 완벽한 조화를 이루려는 전주 음식의 맛에서 어딘가 부족함을 느낀다. 다양한 재료를 조화롭게 배합해 완전한 균형을 이뤄냈지만 네모반듯한 정형 그 자체여서 전주 음식을 몇 달 몇 년을 먹다보면 라면이 충격적으로 맛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아이러니하게도 한식으로 명성이 드높은 전주에 여러 개의 체인점을 두고 있는 OOO피자의 판매량은 전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무자극한 음식들을 먹을 때마다 그럴 만하겠다는 생각을 종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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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중순을 넘어서자 전국 각지의 김치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우선 에그 조가 들고 온 김치가 인상적이었다. 에그 조는 전라남도 나주 사람인데 나주에 살고 있는 누님이 담가 보내준 무김치에는 남도의 정서가 물씬 배어 있었다.

짧고 굵은 조선무를 4등분해 그대로 담갔다. 입을 아주 크게 벌려야만 한입 베어 먹을 수 있다. 너무 커서 젓가락으로 집을 수조차 없으므로 한 손에는 밥 한술 뜨고 다른 한 손에 김치를 집어들어야 한다. 밥을 입에 떠넣고 입을 아주 크게 벌린 다음 손가락으로 집어든 무김치를 입안으로 밀어넣고 베어 먹어야 한다. 이 판국에 양반님네 점잔 같은 소리는 집어치워야 한다.

아무리 먹기 사나워도 한입 베어 물어 아작아작 씹다보면 감탄이 절로 터져나온다. 군내 하나 없이 시원하고 상큼한데다 잘 삭은 젓갈로 맛을 낸 국물 맛이 무 안쪽까지 깊이 배어 감칠맛까지 더해준다. 시원시원 거침없이 담근 김치이므로 먹는 것도 그리해야 한다. 깨작깨작 작은 것을 골라 먹으려 한다거나 칼로 썰어 먹기 좋게 담아서는 그 맛을 느낄 수 없다. 그랬다가는 김치가 서운하다며 한마디 할 것이다. “지랄 말고 그냥 처먹어, 임뫄!”

내년 여름에야 익을 어머니의 김치

며칠 뒤 함께 일하는 친구의 누님이 김장김치를 들고 찾아왔다. 어청도가 고향인 친구네 김치에는 어청도에서 잡아 담근 젓갈이 들어갔다. 또한 어청도에서 재배한 배추로 김치를 담갔다. 배추는 작고 푸른 잎이 많은데 그 질기고 푸른 잎에 비린내 짙은 젓갈이 더해져 예사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강렬한 맛과 향을 낸다. 12월 초순에 담근 이 김치는 이제 적당히 익어 숨이 죽고 맛이 조화를 이뤄가는 중이라 비린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맛이 좋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한 달 후면 비린 냄새도 가시고 거칠었던 푸른 잎도 무뎌져 고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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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던 김치들은 막 담갔을 때 먹기 좋거나 한두 달 안에 먹어야만 하는 김치라면 해안가에서 담근 거친 김치들은 이듬해 봄이 되어서 묵은지가 되었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질기고 푸른 배추이기에 시간이 지나도 무르지 않고 젓갈을 많이 넣어 짜게 담갔으므로 시간이 지나도 군내가 나지 않고 감칠맛이 살아 있다. 그 김치만 있다면 입맛 없는 봄날에도 물 만 밥 개운하게 넘어간다. 우메보시 오차즈케만 멋일 리 없다. 우리에겐 물 만 밥 위에 얹은 묵은지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어미가 김장김치 한 통을 내주었다. 내 어미의 김치는 어청도 김치보다 더욱 강렬하다. 이런저런 잡생선을 한데 몰아넣고 담근 잡젓으로 김치를 담근다. 맑은 액젓만 걸러 담근 것이 아니라 꾹꾹 쥐어짜 뼛국물까지 모두 집어넣는다. 거기에 자젓(크기가 작은 새우로 담근 젓갈), 새우젓, 멸치액젓도 더한다. 마늘, 생강을 거침없이 넣고 모든 양념은 갈아 넣는다. 그리고 고춧가루는 조금만 넣는다.

얼핏 보기에 속도 없고 색도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코를 가까이 대면 지독하다 싶을 만한 향이 느껴진다. 그래서 막 담근 김치는 먹을 수 없다. 적어도 한 달은 지나야 맛을 알 수 있고 설 무렵에야 김치답다는 생각이 든다. 이 또한 내년 봄이나 여름이 되었을 때 완숙에 이르게 된다.

며칠 전 친구와 함께 칠리 곤잘레스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악보에 표기된 한 음절을 연주하는 것인데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 같은 악기고 같은 악보인데 내가 연주하는 음악과 칠리 곤잘레스가 연주하는 음악이 다르다. 클래식은 변주를 용납하지 않으려 하지만 재즈는 변주 자체다. 칠리 곤잘레스는 정통 클래식에서 시작해 재즈를 지나 랩과 일렉트로닉을 넘나들며 변주한다. (개인적으로 칠리 곤잘레스는 노래는 안 했으면 좋겠으나….)

지난 두 달간 맛본 다양한 김장김치의 맛들이 스쳐지나갔다. 김치라 불리는, 비슷한 레시피로 조리되는 같은 음식이 지역과 풍토, 사람의 성향에 따라 맛을 달리하고 색을 달리하고 향을 달리하고 시간을 달리하고 먹는 방법까지도 달라지게 한다. ‘이것이 피아노 연주다’라고 말할 수 없고, ‘이것이 김치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레시피란 공산품이거나 개똥

간혹 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한국 음식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마다 어쩐지 어색해서 웃음이 나오고 만다. 김치나 고추장, 된장을 어떤 정형화된 하나의 형태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저 사람들은 김치의 종류가 수백 가지가 된다는 사실을 알까? 곰팡이 핀 메주를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내가 알고 있는 우스터소스는, 케첩은, 오렌지 마멀레이드는, 프렌치 프라이드는 캔과 병, 봉지에 담겨 있는 정형화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분명 우스터소스 하나만 하더라도 나라마다, 지역마다, 집집마다 모두 다른 맛을 내며 각자의 취향에 따라 변주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표기된 레시피란 공산품이거나 개똥이다.

전호용 식당 주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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