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더위 먹지 말고 이것

강이며 바다에서 거둬 올린 것들 푹 고아 동네 사람 둘러앉아 먹는 여름 음식들
등록 2016-08-19 23:15 수정 2020-05-03 04:28

아침에 눈떠 창문 열고 밖을 내다봤더니 건너편 빌라 옥상에서 중년 남자가 그물 손질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는 그물에서 떼어낸 자잘한 물고기들을 모아 아이스박스에 담고 있었다. 그물은 가느다란 나일론 줄로 엮은 자망이었는데 그물코 사이사이에 은빛 물고기들이 제법 많이 박혀 있었다.
그물코 손질하는 도시의 어부

큰 솥에 뽀얗게 고아낸 생선 국물에 된장, 고춧가루, 계피, 대파, 부추로 맛을 낸 어죽은 여름을 이겨내기 위해 사람들이 자주 찾는 음식이다. 농촌진흥청 제공

큰 솥에 뽀얗게 고아낸 생선 국물에 된장, 고춧가루, 계피, 대파, 부추로 맛을 낸 어죽은 여름을 이겨내기 위해 사람들이 자주 찾는 음식이다. 농촌진흥청 제공

장마철 저수지 물이 불어 넘치면 물이 흘러드는 자리에 자망을 펼쳤다. 짧게는 10여m, 길게는 50여m가량 그물을 펼치고 하룻밤을 기다렸다 다음날 새벽 그물을 걷어 올리면 그물코 여기저기에 붕어, 잉어, 빠가사리, 가물치, 메기 등이 묵직하게 걸려들어 펄덕거렸다. 지느러미와 아가미가 그물코에 엉겨 붙은 물고기를 떼어내 이집 저집 나눠주거나 마을회관에 모여 함께 끓여 먹었다. 내가 살던 마을은 평야인데다 바다와 가까운 강의 하류 지역이라 피리, 동자개, 민물새우 같은 어종은 잡히지 않았다. 크고 억센 고기가 많아 어죽은 끓이지 못하고 주로 시래기나 묵은지를 넣고 지져 먹었다.

전주는 완주, 임실, 진안, 무주, 장수와 같은 내륙 산간지방과 인접한 도시다. 도시를 가르는 전주천은 완주와 임실에 위치한 계곡에서 내려온 물이 모여 흐르는지라 차고 맑다. 이 물에는 작고 재빠른 다양한 물고기들이 많이 산다. 전주에는 고창, 부안, 군산과 같은 해안가에 살다 이주해온 사람도 많지만 산간지방에서 온 사람이 태반이다. 여름 되면 개천에 자망 펼치고 족대 들고 개울물에 뛰어들어 낚아올린 물고기들로 어죽 끓이고 국수 말아 먹는 짓을 한여름 몸보신으로 여기며 자란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거다.

아무리 어로 행위를 금지하고 벌금을 매긴다 위협해도 하던 짓을 안 하고는 못 산다. 아마도 중년 부부는 밤중에 어둠을 뚫고 강으로 나갔으리라. 남자는 사려진 그물 끝 나일론줄을 붙잡고 가슴까지 차오르는 강물을 건너 그물을 펼치고 집으로 돌아와 새벽이 오길 기다렸을 테지. 동트기 전, 인적 없을 어스름한 새벽에 다시 강으로 나가 그물을 걷어 올리자 그물코에는 피리, 납자루, 종개, 붕어, 얼씨구나 동사리도 몇 마리, 횡재했구나 쏘가리 다닥다닥 들러붙어 올라왔을 테다. 부부의 얼굴 얼마나 환하게 피어났을까. 빨랫줄에 그물 걸어놓고 그물코 손질하는 아저씨, 하얀 난닝구에 알록달록 트렁크 빤쓰 입고 도심의 빌라 옥상에서 그물코 손보는 배 나온 아저씨가 자못 늠름한 어부처럼 보였다.

그렇게 잡아온 물고기 혼자 먹을 성싶은가. 여기저기 흩어진 고향 사람들 불러들여 어죽 한 솥 푸지게 끓여 먹었을 테지. 어죽 한 그릇 먹자는 전화에 이 사람 저 사람 군침 흘리며 쫓아왔을 테지. 한 손에 소주 들고 다른 한 손에 수박 한 덩이 들고 쫓아왔을 테지. 더러는 막걸리 들고 또 더러는 빈손 맨입으로 발길 하는 사람 있어도 푸지게 먹고도 남을 것인데 그것이 뭔 상관.

강원도 백병산에서 발원해 동해, 삼척을 가르고 바다로 흘러가는 오십천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십천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산다. 도계에서 동해, 정동진, 강릉으로 나아가는 철로 옆 오십천 어느 굴곡진 자리에서 나는 보았다. 한 사람이 물 흘러가는 방향으로 족대 펼치고 버텨서면 다른 한 사람은 쇠뭉치 지렛대를 바위 틈에 끼워넣고 들썩거린다. 바위 틈에 숨어 살던 작은 물고기들 이게 뭔 일인가 싶어 허둥지둥 튀어나오면 족대 펼치고 있던 사람 그물을 들어올려 물고기를 낚았다. 초여름이고 휴일이던 그날 두 사람은 잡어 한 양동이 잡아들고 마을로 돌아갔다.

“그것으로 뭐 해먹어요?”

“어디서 오셨데요?”

“전라도 전주서 왔는됴….”

“거기 사람들은 이런 거 안 먹고 산데요? 물어보나 마나 어죽 아니드레요. 쐬주 한잔하기에 이만한 게 어디 있기나 하데요, 허허허.”

사천해변에서 먹은 어죽 한 그릇

오십천 돌아 강릉 사천해변으로 넘어갔을 때는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마을 부녀회와 청년회에서 운영하는 해수욕장을 개장하던 날, 마을 사람들은 해변에 모여 고사를 지냈는데 손님을 위해 준비한 음식이 어죽이었다. 드넓은 동해를 앞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음식이 민물고기 어죽이라니. 사천해변 옆으로는 오대산에서 발원해 동해로 향하는 사천천이 흐르는데 바다에서 오만 가지 수산물을 거둬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해도 여름철 보양식은 민물고기 어죽만 못한 모양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인근 마을에 사는 아낙들이 해변에 모여 커다란 솥을 걸고 어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이전에 몇 번 어죽을 얻어먹긴 했어도 어죽 끓이는 것을 처음부터 지켜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청년들이 새벽에 사천천에서 잡아온 잡어 한 양동이를 끓는 물에 넣어 무르게 삶은 뒤 소쿠리에 받쳐 으깨었다. 삶은 고기를 으깨며 물을 부어 살코기를 흘려보내고 뼈와 가시를 골라냈다.

그렇게 걸러낸 뽀얀 국물에 된장, 고춧가루, 계피 등으로 양념하고 대파와 부추를 듬뿍 넣어 끓여낸 어죽을 마을 어르신들과 해수욕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한 그릇씩 나눠줬고 내 앞에도 한 사발 내주었다. 내 옆자리엔 나이 아흔을 바라보는 그 마을의 최고령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잔치상 위에 푸짐하게 차려진 기름진 고기와 통닭, 떡과 과일 등은 손대지 않았다. 노인은 평생을 먹고 살아온 어죽과 오징어회, 그리고 소주 반병에 흐뭇해했다.

좁은 땅덩이 그 더위가 그 더위일 텐데 어디서는 “개 혀야 여름 가유” 하고, 어디서는 “민어탕 한 사발 못 먹고 워치케 여름을 난다냐” 하고, 또 어디서는 “전복, 해삼 두툼하게 썰어 넣은 물회 한 그릇은 무야 여름 간다 아입니꺼” 한다. 올해도 사천해변, 오십천을 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옥상어부처럼 맑게 흐르는 강물에 기대어 여름을 이겨내고 있을 테다.

더위에 무탈하십니까

나는 언젠가부터 이렇게 입맛 없고 기운 없는 날이면 지독하게 비린 것이 생각난다. 골탕하게 삭은 성게알젓, 웅어젓, 비린내 물씬 풍기는 생고등어찜. 이것들이면 앞으로 50년은 무탈하게 여름을 날 것 같다.

대한민국 원주민들이여 다들 무탈하십니까? 입에 맞는 좋은 음식 먹으며 무더위 견뎌내길 바랍니다.

전호용 식당 주인· 저자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 캠페인 기간 중 정기구독 신청하신 분들을 위해 한겨레21 기자들의 1:1 자소서 첨삭 외 다양한 혜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