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 모가지 꺾어졌응께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던 6월 말부터 막바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오늘까지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냈다. 휴일 없이 일했고 휴가라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작은 공원에 서 있는 나무들은 두 달 전이나 오늘이나 별반 다름없이 푸르기만 하고 들숨으로...2016-08-31 21:42
더위 먹지 말고 이것아침에 눈떠 창문 열고 밖을 내다봤더니 건너편 빌라 옥상에서 중년 남자가 그물 손질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는 그물에서 떼어낸 자잘한 물고기들을 모아 아이스박스에 담고 있었다. 그물은 가느다란 나일론 줄로 엮은 자망이었는데 그물코 사이사이에 은빛 물고기...2016-08-19 23:15
저 무욕의 집을 향해염전 한가운데 보루꾸(가운데 구멍을 내 시멘트의 양을 줄인 시멘트 블록)로 담 올리고 슬레이트로 지붕 얹고 연탄보일러 깔아놓은 외딴 단칸방이 있었다. 본디 염부들 일하다 지치면 잠시 등 대고 누워 쉬거나 눈비 쏟아지면 피신할 수 있도록 지어놓은 움막이었다. 그런 움막에...2016-07-29 17:04
율마의 삶 편백의 삶장맛비는 사흘째 쉬지 않고 내리는데 처마 아래 우두커니 선 화분에는 비가 닿지 않는다. 화분에 심긴 율마 네 그루는 환장할 지경이다. ‘뭔 놈의 비가 이리 쏟냐’고 구시렁대며 처마 아래로 비를 피했을 때 마른 흙에 뿌리박고 비를 갈망하는 율마 네 그루가 눈에 들었다. ...2016-07-16 17:08
개집이 된 허브하우스노부부를 만난 건 신메뉴를 개발해보자는 생각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기름진 음식과 어울릴 만한 담백한 피자와 향기로운 샐러드를 개발해볼 요량으로 생잎 허브를 선택했는데, 시중에 유통되는 생잎 허브의 종류는 10여 년 전에 비해 보잘것없이 줄고 가격은 몇 배나 뛰어올라 단...2016-07-01 16:58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똥그녀와 수박을 나눠 먹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수박씨를 씹어 먹고 있었다. “수박씨도 씹어 먹어요?” 수박씨를 접시에 발라내던 그녀의 귀에 수박씨 씹히는 소리가 들렸던 모양이다. 이물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편함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다시 수박을...2016-06-17 17:12
보험 대신 오늘의 밥과 술밥을 팔다보면 각자가 먹은 밥값을 나눠 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끼니란 누구에게나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는 일상일 것이므로 끼니에 대한 값을 내는 방식으로 감정노동하지 말고 각자의 밥값은 나눠 내자는 합의에 따른 행위일 것이다. 밥을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야 밥값을...2016-06-03 10:48
위야 오늘은 좀 쉬자남들이 쉬지 않는 화요일이 휴무라서 좋은 것은 어딜 가든 한적하고 조용하다는 것이다. 휴일 한낮에 시장을 나가도 느릿느릿 걸으며 상인들이 내놓은 물건을 꼼꼼히 들여다볼 수 있고, 한가해진 식당에 홀로 앉아 밥을 먹고 오랫동안 막걸리를 마셔도 자리 하나 차지한 것을 미안...2016-05-21 17:18
제 스스로 살아가기 마련이다이 이야기는 성공담이 아니다. 요즘 같은 시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찌끄레기들의 좌절담이거나 자기 위안 혹은 변명으로 해석될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친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친구와 시골마을에서 함께 자랐다. 우리 부모나 친구의 부모 할 것 없이 노상 정신없이 바빴던 사람들인...2016-05-04 21:10
이성당 빵보다 개떡매일 아침 출근길에 전주 모래내시장을 지난다. 언제나 이른 아침이면 시장통 상인들은 문을 열고 장사 준비를 한다. 한겨울 7시30분께는 어둑한 새벽녘이라 공판장에서 물건을 떼다 파는 어물전과 채소가게 사람들만 부연 입김을 뿜어내며 수선거리지만 날 풀리고 해 길어진 4월...2016-04-21 19:03
어미의 단무지1920년.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가 운영하는 불이흥업주식회사(不二興業株式會社)는 옥구군 일대 간석지 2479만3388m²의 둘레에 방조제를 쌓아 간척지를 조성했다. 현재의 지명으로 말하자면 군산시 소룡동에 위치한 월명산 끝자락에서부터 옥서면 옥봉리 내성산을 돌아 ...2016-04-09 16:39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행복하십니까?”지난해 이맘때 한 남자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오전 10시 무렵이었으니 장사 준비 하느라 정신없을 그런 시간이었다. “여기가 서울이라 전주까지 갈 수는 없고 궁금한 게 있어서 전화했소.”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한 늙은이의...2016-03-26 22:46
맛의 스펙트럼달콤한 음식을 먹을 때 ‘달다’라고 느낀다면 그 단맛은 모두 같은 것일까? 가령, 설탕과 꿀 둘 다 달지만 설탕의 단맛과 꿀의 단맛은 다르다. 수박과 딸기의 단맛이 다르고 오이와 참외의 단맛도 다르다. 같은 참외라 하더라도 봄에 딴 것과 여름에 딴 것의 단맛이 다르고,...2016-03-10 22:37
그리고 기다릴 것이다냉장고가 없으면 뭐든 말리고 절여야 보관할 수 있다. 그때그때 계절에 맞춰 얻을 수 있는 채소, 과일, 물고기, 고기만 가지고도 얼마간 살아갈 수 있을 테지만 이 나라는 비 오고 눈 내리고 바람 불고 추워지면 땅은 씨앗을 감추고 바다는 파도를 일으키고 짐승들은 눈에 띄...2016-02-26 11:13
부끄러움이 부끄럽다몇 년간 등·하교 시간에 오가던 길가에 서 있던 낡고 오래된 빨간 벽돌집이었다. 100년을 오간다 해도 눈여겨볼 이유가 전혀 없을 그런 집이었다. 몇 년을 오갔는데도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그 집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가 많이 내리던 여름날 아침...2016-02-06 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