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성공담이 아니다. 요즘 같은 시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찌끄레기들의 좌절담이거나 자기 위안 혹은 변명으로 해석될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친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친구와 시골마을에서 함께 자랐다. 우리 부모나 친구의 부모 할 것 없이 노상 정신없이 바빴던 사람들인데다 자식도 많아 일일이 챙겨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아침밥 먹여 학교 보내면 저녁때까진 저희들 알아서 놀아야 했으므로 친구와 나는 그 시간을 내내 붙어 놀았다.
친구는 공부를 못했다. 나라고 공부를 잘했을 리 없지만 내 눈에 답답해 보일 정도였으니 말도 못하게 공부를 못했던 거다. 한글은 초등학교 3학년이 넘어서야 겨우 떠듬떠듬 읽기 시작했고 구구단외기는 종아리 때리던 선생님이 지쳐 포기해버릴 정도였다. 그런데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사람이 달라 보였다. 친구는 공부 말곤 뭐든 잘했다. 나무도 잘 타고, 낚시도 잘했다. 특히 기계를 다루는 솜씨가 대단했는데, 어떤 기계든 몇 번 보고 만지기만 하면 작동 방식과 원리를 이해하는 듯 보였다.
몇 번 보고 만지기만 하면 이해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에는 뒤뜰에 버려진 고장난 자전거를 고쳐 타고 놀았다. 처음엔 타이어 없이 휠만 남은 자전거를 밀고 끌며 놀다 자전거포에서 타이어 수리하는 것을 지켜본 우리는 그것을 따라했다. 처음부터 잘될 리 없었지만 몇 번의 실패 끝에 펑크 난 타이어를 때우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몸에 맞는 작은 자전거를 사주는 집은 없었다. 어른들이 타다 고장난 검정 자전거를 타고 놀았던 것이므로, 우리 몸에 맞지 않았지만 그저 밀고 끌며 놀다보니 어느새 안장 위에 올라타 달리게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친구는 경운기를 몰았다. 12살 어린것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경운기를 몬다니 의아할 테지만 시골에서 그 나이쯤은 한몫의 일을 해내야 할 때다. 읍내로 막걸리 심부름이라도 보내려는데 오토바이도 못 타면 반거충이 신세를 면키 어렵다. 그렇다보니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하지 말라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가르쳐준 사람도 없었다. 둘이 뚝딱거려 고장난 경운기를 살려내고 취해 잠든 아비의 호주머니에서 오토바이 키를 몰래 빼들고 나와 달리며 몸으로 기계를 익혔다.
고장난 것을 고쳐 타야 했으므로 공구를 사용하는 방법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렌치, 펜치, 멍키스패너, 롱노즈의 용처를 구분할 수 있었고 톱을 사용하는 방법, 칼을 갈아 벼르는 방법, 다양한 망치의 용처, 모터와 엔진의 작동 원리가 어떻게 다른지 등은 누가 가르쳐주거나 책으로 학습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중학생이 된 나는 기계보다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지만 친구는 여전히 기계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주말이 되면 읍내 비디오가게에서 최신 영화 두세 편과 오래된 영화 두세 편, 로망포르노 한두 편을 빌려 친구집으로 향했다. 우리 집엔 없던 비디오테크가 친구집에는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안방이 아닌 친구 방에 비디오데크가 놓여 있었다.
친구는 재미있는 영화는 끝까지 봤지만 지루한 영화는 보다 잠들었으므로 초저녁에는 장클로드 반담이 출연하는 할리우드 액션영화라든가 이연걸이 출연하는 중국 무협영화, 티코 아저씨와 그랜저 사모님과 같은 포르노 영화를 주로 보았고 친구가 잠들면 같은 영화를 보며 밤을 새우고 다음날 저녁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는 그 무렵 커다란 트랙터를 몰고 다니며 밭과 논을 갈았고 개와 돼지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까지도 친구와 나는 함께 영화를 보고 집안일을 도왔지만, 친구는 내가 보는 영화를 이해할 수 없었고 나는 커다란 트랙터의 작동 방식이나 엔진과 미션의 연결 부위에 문제가 있다는 친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관심 분야는 갈렸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학교도 갈렸다.
양파를 썰다 궁금해졌다친구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음식 배달을 시작했다. 오토바이 타는 것이 좋았고 돈 벌어 오토바이 한 대를 사고 싶기도 해서였다. 그렇게 125cc 오토바이 한 대를 마련한 친구는 또래와 무리지어 군산 시내 길바닥을 누비며 폭주를 놀이 삼았다. 속도의 한계에 직면하면 제 손으로 오토바이를 개조해 더 빠른 속도로 달렸다. 여전히 공부는 못했지만 기계 다루는 솜씨는 또래를 뛰어넘어 전문가도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으므로 당연하게도 고등학교를 아직 졸업하지 않은 학생을 군산에 있던 대우자동차에서 스카우트해갔다.
이후 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들을 수만 있었다. 자동차회사에선 그를 일본으로 보내 고급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독려하고 지원했다. 일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회사에서 성실하고 뛰어난 기능공으로 활약했지만 회사 밖에서의 생활은 달랐다. 제 손으로 튜닝카를 만들어 암암리에 행해지던 드래그레이싱(짧은 거리를 직선으로 빨리 이동하는 자동차 경주)이나 공도레이싱(공공도로에서 불법적으로 하는 경주)에 참가하거나 폭주를 일삼다 체포되고 풀려나기를 반복했다. 대우자동차가 망하고 GM으로 인수될 무렵 친구는 일자리를 잃었다. 서류만 놓고 본다면 학업성적은 미진한데다 범죄자로 보였을 테니 퇴출 1순위를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양파를 썰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어떻게 딴생각을 하면서도 손을 다치지 않고 양파를 종잇장보다 얇게 썰 수 있게 되었을까. 힘을 주고 힘을 놓는 방법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이며 손목과 손가락과 손잡이와 칼날의 각도를 순간순간 달리하며 양파를 써는 방법은 누구에게 배운 것일까. 아무도 가르쳐준 사람 없는데 채소와 고기와 생선을 자르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은 또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학습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라 몸이 저 알아서 배운 것이라 그것을 설명할 방법은 알지 못한다. 그저 막연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놀이 삼다보니 도구 활용 방법을 익힐 수 있었다는 것뿐이다.
자전거를 고쳐 타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고 다치고 부러졌다. 그러나 실패는 어떤 좌절도 불러오지 않았다. 타이어에서 바람이 빠지면 까르륵 웃곤 다른 방법을 모색하거나 바람 빠진 자전거를 그대로 타고 놀았다.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글을 읽지 못하고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고 알파벳을 읽지 못할 때 선생님들은 점수로 우리를 평가하고 잘못을 뉘우치라며 회초리를 들었지만, 내가 좋아 스스로 익히려 노력했던 것에 대해서는 평가받은 적도 뉘우침을 강요받은 적도 없다. 몸에 남은 건 회초리 자국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과 깨우침이었다.
대신 살 것 아니면 가만히 있으라그래서 그 친구는 지금 뭐하고 사냐고? 몇 년 전부터 포클레인을 운전해 먹고산다. 그렇게 속도에 매료됐던 사람이 느려터진 포클레인을 운전해 먹고산다니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 사람이 매료됐던 건 속도가 아니라 기계의 작동이었으니까.
일본 애니메이션 에서 쿠마테츠는 이렇게 말한다. “의미는 스스로 찾는다.” 삶은 제 스스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대신 살아줄 것 아니면 가만히 있으라 말고, 부모의 무덤으로 함께 들어갈 생각이 아니라면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찾으시라.
전호용 식당 주인· 저자※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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