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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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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무욕의 집을 향해

도시를 떠나기 위해 도시에서 사투를 벌이는 나날… 집을 위해 가혹한 노동 견딘 친구의 부모 떠올려
등록 2016-07-29 17:04 수정 2020-05-03 04:28

염전 한가운데 보루꾸(가운데 구멍을 내 시멘트의 양을 줄인 시멘트 블록)로 담 올리고 슬레이트로 지붕 얹고 연탄보일러 깔아놓은 외딴 단칸방이 있었다. 본디 염부들 일하다 지치면 잠시 등 대고 누워 쉬거나 눈비 쏟아지면 피신할 수 있도록 지어놓은 움막이었다.
그런 움막에 살림을 들이고 두 자식을 키우는 부부가 있었다. 전귀남씨 부부. 슬하에는 두 아들 종학과 영학이 있었다. 나는 이 집의 막내아들 영학이와 같은 마을에서 며칠 터울로 태어나고 자란 동갑내기였다. 우리는 늘 붙어다니며 놀았고, 종종 놀다 지치면 나는 그의 집에서 밥 얻어먹고 어두워지면 잠을 잤다.
네 사람의 온기로 살아낸 7년

염전에서 하루 종일 일했던 친구의 부모는 마침내 도회지에 집을 마련했다. 그곳에서 삶이 더 좋았는지는 의문이다. 염전에서 일하는 사람. 박승화 기자

염전에서 하루 종일 일했던 친구의 부모는 마침내 도회지에 집을 마련했다. 그곳에서 삶이 더 좋았는지는 의문이다. 염전에서 일하는 사람. 박승화 기자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편에 방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하나 있고 그 옆으로 연탄보일러가 자리잡고 있었다. 출입문 오른편에는 보루꾸로 쌓고 시멘트로 미장한 부뚜막이 자리했는데 그 위에는 여러 가지 양념통과 냄비, 밥그릇 등과 더불어 석유풍로 한 대가 버티고 서 있었다. 이것이 부엌 살림살이의 전부였다. 장독대는 슬레이트 지붕 아래, 수도는 마당에, 쌀통은 방 안에 있었다.

살림살이가 이러함에도 끼니때가 되면 영학이 어머니는 근사한 밥상을 차려냈다. 우선 씻은 쌀을 연탄불 위에 올려 밥을 짓기 시작했다. 연탄불 위에 밥솥을 올리고는 석유풍로 심지에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면 매캐한 연기가 방 안까지 번지는데 나는 그 냄새가 밥 냄새처럼 좋게 느껴졌다(지금도 석유 타는 냄새가 싫지 않고 때때로 식욕을 당길 때가 있는데 석유풍로 위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음식들 때문일 것이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던 석유풍로에 바람구멍을 조절하면 불꽃이 사뭇 파래지는데 그때부터 풍로 위에서 여러 음식이 만들어진다.

우선 국이나 찌개를 풍로불 위에 얹어 끓인다. 콩나물국처럼 금세 끓이는 국은 풍로에서만 끓이고 김치찌개나 된장찌개처럼 오래 끓여야 하는 것은 뜸 드는 밥솥을 연탄불 위에서 내리고 냄비를 올려 더 끓였다. 국이 다 끓고 나면 김치부침개나 부추전, 달걀프라이, 달걀물 바른 소시지 등을 풍로불에 구워냈다. 아주 가끔은 불고기를 볶기도 했다. 연탄불에서 국이 다 끓으면 솥을 내리고 들기름 바른 김을 굽고 바로 앞 뚝방 너머 바다에서 잡아 말린 망둑어나 숭어를 굽기도 했다. 밥을 뜸 들일 때 새우젓으로 간한 달걀물을 밥솥 안에 넣어 달걀찜을 만들고 고춧가루만 뿌린 간고등어나 싱싱한 조개를 밥 위에 얹어 찌기도 했다. 밥의 열기로 만들어지는 음식이 그뿐이던가. 밥을 뜸 들일 때 호박잎을 얹어 찌기도 하고, 밤·감자·고구마 등을 얹어 찌기도 했으며, 식은 강된장과 국을 덥히기도 했다.

네 식구가 둘러앉아 그렇게 지은 밥을 먹었다. 나는 가끔 그 틈에 끼어 밥을 얻어먹었고 밥상 치운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달라붙어 잠들 때 그 틈에서 자기도 했다. 염전 들판에 홀로 선 외딴집에 변변한 가림막 하나, 담장 하나 없었으므로 겨울이 시작되면 북서풍이 지독하게 매서웠다. 방 안으로 찬 기운 스멀스멀 밀려들면 벽에 담요를 덧대고 서쪽으로 난 창문을 틀어막아 온기를 보전했다. 연탄보일러, 두꺼운 솜이불, 네 사람의 온기로 7년을 살아냈다.

그러나 염전을 벗어나지 못하고

부부는 7년간 소금에 몸을 녹였다. 누구보다 이른 시간에 염전으로 나갔고 누구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랬던 만큼 누구보다 많은 양의 소금을 거둬들였다. 소금 팔아 번 돈은 식구들 밥 먹이고 자식들 학교 보내는 데 말고는 쓰지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아금박스럽게 모은 돈으로 군산 시내에 지어진 신축 아파트 한 채를 분양받아 이사했다. 우리가 중학생이 되던 해였다.

이사하고 첫 주말이 되던 날 나는 아파트로 찾아갔다. 신축 아파트라 집집마다 이삿짐을 들이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대부분의 집들이 엄청나게 많은 이삿짐을 집 안으로 들이고 있었고 차마 버리지 못하고 싸들고 왔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버려진 장롱, 세탁기, 냉장고 따위가 주차장에 가득 쌓여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아파트에는 두 형제만 있었다. 친구의 부모는 그날도 염전에 나가 일하고 있었다. 부부는 염전이 문 닫을 때까지 염부로 살았다. 집 안은 휑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거실에 TV 한 대, 주방에 냉장고 한 대가 있었다. 두 형제가 사용하는 방에 책상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것 말고는 없었다.

보일러를 켜지 않은 집은 추웠고 먹을 것도 없었다. 집 안에선 할 게 없어 놀이터에 나갔지만 드넓은 염전이 놀이터였던 우리에게 아파트 단지 내 작은 놀이터는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이웃 없는 염전의 단칸방을 들락거릴 때 단 한 번도 초라하다고 느껴본 적 없었는데 이웃한 수많은 집들 사이에서 상대적인 초라함을 느꼈다. 이것이 내가 처음 느꼈던 빈부 격차였다.

시골마을에선 단출한 이삿짐을 싸들고 도시로 떠나는 그들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시기하거나 빈정거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마을에서 외떨어진 변방에서 7년간 어떻게 살았는지 온 마을 사람들은 잘 알았고, 부부가 어떻게 피땀 흘려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게 되었는지 두 눈으로 지켜보았으므로 진심을 다해 환송했다.

그러나 내 눈엔 다시 가장 못한 삶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풍요로웠던 식탁엔 식은 밥과 라면만 있었고 한자리에 둘러앉아 밥 먹으며 나눴던 온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부부는 새롭게 마련한 집과 자라는 아이들을 건사하기 위해 매일같이 버스를 타고 염전으로 향했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전에 살던 단칸방에서 지냈다. 일이 많은 여름철에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염전에서 밥을 지어 먹고 잠을 자며 일했다. 자연스럽게 두 형제는 저희들 알아서 밥 먹고 학교 가며 도시의 삶을 배워나가야만 했다.

부디 다들 목적지에 닿기를

나와 그녀는 작은 소망 하나를 붙들고 오늘을 견뎌내는 중이다. 돈벌이에 인생을 낭비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짓거리라 일갈했던 나는 근래 들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돈벌이에 열중하고 있다. 적금이란 걸 처음 들어보았고 다달이 늘어나는 숫자가 뿌듯하기도 하다. 이렇게 내 스스로를 부정하며 우리가 소망하는 것 또한 집이다. 어딘가에 있을지 없을지 모를 무욕의 땅을 마련해 그 위에 두 사람의 힘만으로 기둥 세우고 돌 쌓아올리고 흙 이겨 발라 집을 지어보자는 소망을 앞에 두고 도시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렇게 돈벌이에 열중하느라 도무지 몸을 가누기도 어려울 만큼 지쳐버린 어느 날 염전을 떠나기 위해 염전에서 사투를 벌였을 부부가 떠올랐다. 도시를 떠나기 위해 도시 안에서 사투를 벌이고 무욕의 땅을 찾기 위해 욕망으로 가득 찬 도시의 중심에서 길을 구하는 우리는 과연 각자의 자존감을 잃지 않고 목적지에 가닿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러해서 사투일 것이다.

나는 죽기로 각오한 이 싸움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7년 만에 집을 얻은 그들처럼 목적한 바를 이루기 바라지만 다시 염전으로 돌아가 염부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다시 도시에서 밥을 팔아 밥을 벌고 싶지 않다.

전호용 식당 주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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