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출근길에 전주 모래내시장을 지난다. 언제나 이른 아침이면 시장통 상인들은 문을 열고 장사 준비를 한다. 한겨울 7시30분께는 어둑한 새벽녘이라 공판장에서 물건을 떼다 파는 어물전과 채소가게 사람들만 부연 입김을 뿜어내며 수선거리지만 날 풀리고 해 길어진 4월의 7시30분께는 훤하게 날 밝은 아침이라 한 집도 빠짐없이 문 열고 장사를 준비한다.
여린 쑥 데치고 쌀 한 말 불려 ‘개떡믹스’요즘 시장통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고 잘 팔리는 것은 이런저런 채소의 모종이다. 포트에 담긴 상추, 오이, 가지, 고추, 참외, 수박 따위의 모종들을 좌판과 길바닥에 깔아두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서너 개씩 추려 들고 집으로 간다. 손바닥만 한 것이라도 남새밭이 있는 집은 이맘때 모종을 사다 심어두면 겨울이 오기 전까지 푸성귀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고, 남새밭이 없다 하더라도 화분에 흙 갈아 담고 고추라도 심어두면 서리 맞을 때까지 풋고추라도 따서 먹을 만하기 때문이다.
푸릇푸릇한 모종 좌판 뒤편으로 부연 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구수한 냄새를 뿜어내는 떡집도 일찌감치 문을 열었다. 이제 막 쪄 나와 뽀얀 김 피어오르는 백설기를 비롯해 고슬고슬 팥고물 흩뿌려 쪄낸 팥시루떡, 알록달록 무지개떡, 쫀득한 인절미, 카스텔라보다 포근한 증편, 반질반질 윤기 흐르는 절편 등 색과 모양을 갖춘 떡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입을 유혹하는데 내가 집어든 떡은 개떡이다. 이름이야 개떡이라지만 요즘 시장에 나오는 개떡은 주전자 뚜껑 같은 동그란 틀로 찍어내는지 모양이 반듯하니 보기 좋은데 그 맛은 어릴 적 먹던 개떡맛 그대로다.
이른 봄에 캔 여린 쑥은 색과 향이 옅어 쑥국을 끓이거나 쑥버무리를 만들어 덤벙덤벙 떼어먹기 좋고, 4월이 지나 웃자란 쑥은 색과 향이 짙어 개떡이나 절편을 만들어 먹거나 말려 차로 마시기 적당하다.
어미는 이맘때 캔 쑥을 끓는 물에 데쳐 찬물에 우리고 쌀 한 말 정도를 물에 불려두고는 나를 불러 세웠다. 방앗간에 다녀오라는 것이다. 물에 불린 쌀에 물기를 꾹 짠 쑥을 섞고 소금과 ‘뉴슈가’로 간을 해 방앗간으로 들고 가면 납작납작 떡방아를 찧어주는데 말하자면 ‘개떡믹스’다. 쑥을 넣고 찧은 쌀가루에 따뜻한 물을 부어 익반죽한 것을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뚝뚝 떼어 둥글납작하게 빚어 찜통에 넣고 10분 정도 찌면 개떡이 된다. 이렇게 쪄진 개떡에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발라 채반에 펼쳐 식히면 하루 간식으로 그만이다.
개떡은 잔칫상에 올리는 이름난 떡이 아닌지라 허드레 것으로 그때그때 생각나면 만들어 하나씩 집어먹는 간식거리 정도다. 그래서 시루 가득 푸짐하게 쪄내기보다는 하루 먹을 만큼의 양만 찌고 남긴 가루는 냉동실에, 익반죽은 냉장실에 보관해두고 생각날 때 한 번씩 꺼내 쪄먹는다. 찌는 것이 귀찮고 성가시면 프라이팬에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두르고 익반죽을 납작하게 펼쳐 노릇하게 구워도 마치 화전처럼 맛이 좋다.
어렸던 나는 촌구석 내음 물신 풍기는 못생긴 개떡을 마땅찮아했다. 군산 시내로 학교를 다니던 누이들이 어쩌다 한 번씩 물어다 날라준 ‘이성당’ 카스텔라나 페이스트리에 혓바닥이 마비되었으니 못나고 찐득한 개떡 따위가 어린 것 입에 달라붙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이성당 빵이 어쩜 그리도 스윗스윗하면서 허니허니하고 러블리러블리했던지 대가리깨나 굵어지고 롤라장깨나 들락거리며 방방 밀고 다닐 무렵에는 살강 위의 개떡 따위 말라 비틀어지거나 말거나 이성당 문턱이 닳아빠지도록 들락거리며 수많은 빵과 케이크, 쿠키의 맛을 섭렵하며 스윗허니러블리한 연애질에 몰두했었다.
모싯잎개떡, 취나물개떡, 감자붕생이…아직도 길을 걷다 스윗스윗 허니허니 러블리러블리한 빵 냄새만 느껴져도 우울했던 기분이 싹 가실 만큼 빵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이제는 같은 상 위에 빵과 떡이 함께 놓여 있으면 떡에 먼저 손이 가는 촌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다. 어미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여전하게도 이맘때가 되면 쑥을 캐 개떡가루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자식들 찾아올 때나 혼자서 입이 궁금할 때 한 번씩 꺼내 개떡을 쪄먹는다. 푸성귀를 들고 시장에 나갈 때도 개떡을 쪄서 들고 나가 점심으로 먹기도 하고 밭에서 풀을 매다 허기지면 하나씩 꺼내 참 삼아 먹기도 한다. 겨울에 고구마나 밤이 입에 물리면 개떡을 쪄 염소처럼 오물오물 씹어먹기도 한다. 나도 어미 옆에 반쯤 드러누워 쑥 냄새를 느끼며 다 자란 염소새끼처럼 무심하게 개떡을 오물오물 씹어먹는다.
나이 들어 대천을 떠돌다보니 개떡의 종류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고향에서는 쑥으로만 개떡을 빚었는데 남도에 이르니 보리싹이나 모싯잎을 쑥 대신 넣어 개떡을 쪄낸다. 특히 모싯잎은 억세 쑥처럼 쌀과 함께 넣어 찧지 않고 즙을 짜내 쌀가루에 넣고 익반죽을 한다고 했다. 모싯잎을 넣은 개떡은 초록빛이 선명하고 맑아 떡의 빛깔은 좋지만 향과 맛은 쑥만 못하다. 강원도에 이르니 취나물과 곤드레나물을 쑥 대신 넣어 개떡을 빚었는데 취나물개떡은 쌉싸름한 맛이, 곤드레개떡은 구수한 맛이 좋았다. 충북의 산골마을에선 도토릿가루를 넣어 빚은 갈색 개떡도 오일장에 나와 있었다. 강원도 동해안에서는 감자붕생이라는 떡도 맛보았는데 그 또한 개떡의 일종으로 강판에 간 감자와 밀가루 혹은 쌀가루를 섞어 모양 없이 빚어 그때그때 간식거리로 먹던 생활음식이었다.
그녀와 나는 몇 년 후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 어느 깊은 산골 해 잘 들고 개울 흐르는 땅에 작은 집 짓고 살아가기를 소망하다보니 그러한 토대와 물질적인 형태를 마련하는 것보다 앞서야 할 것이 생활방식과 태도를 익히는 것이었다. 익힌다기보다는 편리했던 것, 욕망했던 것, 스윗허니러블리했던 것들과 멀어지는 연습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땅과 산과 물에서 빌어먹고 살자면 도시의 안락함과 풍요로움에 젖은 몸과 마음을 우선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밥상을 앞에 두고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어쩌다 가끔 만나는 우리는 서로에게 좋고 귀한 것을 먹이고 싶어 산해진미를 밥상 위에 두루 차려놓고 서로를 맞이한다. 그러나 어느 해에 이르러 이 모든 진귀한 음식이 밥상 위에서 사라지고 장과 짠지와 나물, 맑은 국만이 남을 것이라고 서로에게 말하며 키득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불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서로를 사랑했던 열정이 식어 밥상 위에 뱀 나오게 풀반찬만 그득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열정을 합해 새로운 삶을 선택하고 그에 걸맞은 재료를 얻어 밥상 위에 올렸으니 고기반찬이 그립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풀반찬 그득한 밥상으로 가는 길가끔 여러 가지 곡물을 가루 내 빵을 굽기도 하겠지만 빵보다는 개떡이나 감자붕생이를 자주 만들어 간식으로 먹을 성싶다.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다양한 떡과 건너편 빵집의 달콤한 빵을 뒤로하고 가장 못났지만 가장 만들기 쉽고 수더분한 개떡을 들어 입에 넣는다. 쫀득한 개떡에서 풍겨오는 쑥 냄새와 참기름 냄새가 향긋하다. 이만하면 산중에서 이성당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만하다.
전호용 식당 주인· 저자※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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