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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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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야 오늘은 좀 쉬자

식탐에서 멀어지기 위해 재발견한 음식, 묵 …많이 먹어 고통받는 대신 생각을 살찌울 시간으로
등록 2016-05-21 17:18 수정 2020-05-03 04:28

남들이 쉬지 않는 화요일이 휴무라서 좋은 것은 어딜 가든 한적하고 조용하다는 것이다. 휴일 한낮에 시장을 나가도 느릿느릿 걸으며 상인들이 내놓은 물건을 꼼꼼히 들여다볼 수 있고, 한가해진 식당에 홀로 앉아 밥을 먹고 오랫동안 막걸리를 마셔도 자리 하나 차지한 것을 미안해하며 눈치 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낮술 먹으러 금산사로

쉴 틈 없이 몰려드는 술과 밥, 고기를 소화시키느라 과도한 노동을 하는 위를 쉬게 할 필요가 있다. 주말에 고기를 굽는 대신 말캉말캉 기운 없이 씹히는 묵을 무쳤다. 한겨레 자료

쉴 틈 없이 몰려드는 술과 밥, 고기를 소화시키느라 과도한 노동을 하는 위를 쉬게 할 필요가 있다. 주말에 고기를 굽는 대신 말캉말캉 기운 없이 씹히는 묵을 무쳤다. 한겨레 자료

오늘은 비 오는 화요일이었다. 전주 한옥마을에는 날씨와 상관없이 일정에 맞춰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몰려다니며 웃고 떠드느라 왁자지껄했지만, 한옥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남부시장에는 상인들만 두런거릴 뿐 장을 보기 위해 나선 사람은 얼마 없이 한가하기만 했다.

특별히 무얼 사고 먹자고 나선 길이 아니어서 우리는 비 내리는 시장통을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며 진열된 물건들을 구경하다 떡집 앞을 지날 때 개떡과 모시송편을 사들었다. 시장까지 나왔으니 콩나물국밥집에 들러 국밥에 막걸리 한잔 마시는 걸로 배를 채우기도 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황포묵이 눈에 띄어 한 덩이 사들고 오기도 했다. 어쩌면 이렇게 부슬부슬 비 내리고 할 일 없이 시장통이나 어슬렁거릴 수 있는 날에는 국밥이나 떡보다는 말캉말캉 기운 없이 씹히는 묵에 쌉쌀한 막걸리 한잔을 더해 취기를 구하는 것이 제격일지 모른다.

가끔, 일을 너무 많이 해 몸을 가누기조차 힘겨웠던 날들 중 며칠은 버스를 타고 금산사로 향했다. 막일로 밥벌이를 하던 때라 딱히 휴일이 정해져 있지는 않았지만 오늘처럼 아침부터 비가 내리면 통상 ‘데마찌’(하는 일 없이 공치는 것)로 치고 하루를 쉬는 비정기적 휴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날씨의 변화에 따라 갑작스럽게 휴일을 맞게 되었으므로 딱히 계획한 일정이 없는 막일꾼들은 아침부터 모여 고기를 굽자느니 개수육에 소주나 한잔 하자느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기 마련이었다. 그럴 때면 대부분 마다하지 않았지만 몸이 고되고 꼼짝할 기운조차 없는 날에는 고기 한 점 목구멍으로 넘겨 소화시킬 기운조차 없었으므로 전화기를 끄고 금산사로 향했다.

그렇다고 금산사에 들어 뭐 대단한 명상을 하며 심신을 안정시키겠다는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금산사 입구에 즐비한 식당들 중 한적한 식당 하나를 골라 어슬렁어슬렁 기어들어가 도토리묵 한 접시에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켜놓고 하루를 녹여보자는 심사였으므로 ‘금산사’란 그저 버스 차창에 붙은 푯말이거나 혼자 마시는 낮술의 암호와 같은 것이다.

그렇게 찾아간, 비 오는 평일 오후 금산사 입구의 식당에서 채소와 함께 버무린 도토리묵을 오물오물 씹어 삼키고 막걸리 한 주전자를 느릿느릿 마시고 나면 속도 편안했고 이곳저곳 쑤시던 뼈마디와 뭉친 근육도 풀어지는 듯했다.

시장에서 돌아온 우리는 낮잠을 자고 일어나 황포묵을 먹었다. 그녀는 황포묵을 접시에 썰어 담고 양념장을 만들었다. 냉장고에 별다른 양념거리가 없었으므로 진간장에 파프리카와 토마토, 미나리를 썰어 넣고 고춧가루와 매실청, 마늘을 넣어 만든 양념장을 곁들였다. 짭짤하고 아삭한 채소들이 묵과 잘 어우러졌다. 무슨 양념장에 파프리카와 토마토가 들어가느냐 반문할지 모르지만 묵이란 음식을 조금만 달리 보면 의아하게 생각할 것도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파프리카·토마토 양념장에 버무린 묵

묵은 서양의 파스타나 중국의 양장피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음식이다. 녹말에 포함된 글루텐의 성질을 이용해 만든 음식인데, 파스타나 양장피는 반죽한 것을 말리고 다시 삶아 만든 것이고, 묵은 물을 넣고 끓인 것을 식혀 만들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묵을 말리면 파스타면처럼 딱딱해지고 그것을 끓는 물에 넣고 삶으면 파스타면처럼 쫄깃해진다. 이것을 묵말랭이라고 한다.

묵말랭이를 이용해 토마토소스를 곁들여 조리하거나 올리브유를 넣어 샐러드로 요리해도 파스타와 크게 다르지 않고, 여러 가지 채소와 해물을 곁들여 버무려도 양장피 못지않은 훌륭한 요리가 된다. 굳이 서양과 중국의 음식을 응용해 요리하지 않더라도 이런저런 겉절이에 넣어 함께 버무리거나 떡볶이처럼 고추장에 볶아도 맛이 좋고 밥 지을 때 잡곡 대신 넣어도 나물밥 못지않다. 그러니 토마토와 파프리카가 들어간 양념장을 의아하게 생각할 건 없다. 반대로 양념장을 끼얹거나 잡채처럼 간장을 넣어 볶은 파스타면을 의아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조리 방법이나 재료, 모양에 따라 파스타의 종류가 수백 가지가 되듯 묵도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이 가능한 음식 중 하나다. 황포묵은 녹두가루에 치자물을 더해 만든 노란색 묵이다. 치자물을 더하지 않고 녹두가루로만 만든 묵은 청포묵이라 하고, 옥수숫가루로 만든 올챙이묵이 있는가 하면 도토릿가루로 만든 도토리묵, 메밀가루로 만든 메밀묵, 쌀로 만든 쌀묵도 있고, 흑임자를 갈아 넣어 만든 깨묵 등 묵의 종류는 다양하다. 여기에 여러 색을 더해 다양한 색깔의 묵으로 변형이 가능하고, 말리는 방법에 따라, 곁들이는 양념장에 따라 묵은 다양한 요리로 변형이 가능하다.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이 할 생각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이 먹어 고통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우리 몸의 에너지는 노동을 할 때 사용하기도 하지만 먹은 것을 소화시킬 때도 사용한다. 먹어야만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몸이라지만 먹은 것을 소화시키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그러다 지쳐 잠들고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아무런 기운도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즐거움을 밀어내는 노력을

프라이드치킨 한 마리와 함께 취하도록 마신 맥주를 소화시키느라 밤새도록 우리의 소화기관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을 맞이한다. 밤새 열심히 일했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 또다시 해장국을 먹어 노동을 강요하고 그것을 소화시키기도 전에 점심을 먹고 저녁이 되면 회식 자리에 나가 앉는다. 쉴 틈 없이 몰려드는 밥과 통닭과 맥주와 소주와 아이스크림과 커피와 탄산음료와 숙취해소제까지.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도 다음날 아침 좀비 신세를 면키 어려운 이유는 내 몸의 일부인 위장이 밤새도록 노동에 시달렸기 때문일 것이다.

휴일이 되어서 팔과 다리와 머리를 쉬게 하듯 위장도 가벼운 음식을 소화시키며 하루를 편히 쉬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진정한 휴식일지 모른다. 휴일이어서 고기도 굽고 술도 한잔 한다지만 휴일이 아니어서 그보다 못한 식사로 우리의 위장을 홀대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아마 하루도 빠짐없이 고깃국, 고기튀김, 고기구이, 고기볶음을 먹고 마셨을 거면서 뭘 더 먹고 마시느라 위장이 쉴 겨를조차 주지 못할까. 먹는 것 말고는 즐거움을 얻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시대일수록 본능만 충족시키는 즐거움에서 멀어지려 애쓸 필요가 있다.

내가 식탐에서 멀어지기 위해 재발견한 음식은 묵이다. 휴식을 취해야 하는 날엔 묵처럼 가벼운 음식으로 위장도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해보자. 식문화의 발달이 인류의 뇌를 살찌운 것은 분명하지만 생각을 살찌운 것은 아니다. 어쩌면 위장의 휴식이 생각을 살찌울지 모른다. 가끔은 위장도 쉬게 하자.

전호용 식당 주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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