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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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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스펙트럼

다양한 재료의 미묘한 조합으로 만드는 샐러드드레싱… 달고, 시고, 짜고, 쓰고, 떫다 같은 말 사이의 무수한 맛들
등록 2016-03-10 22:37 수정 2020-05-03 04:28
샐러드드레싱 하나에도 경계를 나누기 어려운 맛들이 서로 조화하고 부딪친다. 우선 상상하는 맛을 재료로 그려보자. 한겨레 윤운식 기자

샐러드드레싱 하나에도 경계를 나누기 어려운 맛들이 서로 조화하고 부딪친다. 우선 상상하는 맛을 재료로 그려보자. 한겨레 윤운식 기자

달콤한 음식을 먹을 때 ‘달다’라고 느낀다면 그 단맛은 모두 같은 것일까? 가령, 설탕과 꿀 둘 다 달지만 설탕의 단맛과 꿀의 단맛은 다르다. 수박과 딸기의 단맛이 다르고 오이와 참외의 단맛도 다르다. 같은 참외라 하더라도 봄에 딴 것과 여름에 딴 것의 단맛이 다르고, 더욱 미세하게 맛을 구분하자면 언덕 위에서 충분한 햇빛을 받고 자란 참외와 언덕 아래서 해를 덜 받고 자란 참외의 단맛이 다르다. 잘 익은 된장을 ‘달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굵게 여문 한여름의 소금에서 단맛을 찾아내기도 한다.

맛의 조합과 연결고리

함께 일하는 친구에게 샐러드드레싱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던 날이었다. 내가 만드는 샐러드드레싱의 맛은 시고, 달고, 아주 약간 짜며, 그보다 아주 약간 맵고, 쓰고, 떫다. 신맛과 단맛이 주를 이루지만 짜고 맵고 쓰고 떫은 맛이 없으면 시고 단 맛을 하나로 묶어줄 수 없다. 나는 친구에게 드레싱에 들어갈 재료를 하나씩 불러주었고 친구는 불러주는 재료를 믹서에 담아넣으며 대화를 나눴다.

“우선 고수를 깨끗이 씻어서 담아. 고수는 세 줄기에서 네 줄기를 넣는데 뿌리까지 전부 넣어.”

친구는 고수를 씻어 넣으며 구시렁거렸다.

“이렇게 지독한 냄새가 나는 풀을 처음부터 넣는단 말이지. 그것도 뿌리까지. 그런데도 드레싱에서 그런 맛이 난단 말이야?”

“시끄럽고, 하라는 대로 해봐. 맛은 그리 간단치 않으니까. 청양고추 네 개를 씻어서 그대로 넣어.”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고추를 믹서에 넣었다.

“우스터 두 스푼, 레몬즙 두 스푼, 타임 한 티스푼, 바질 한 티스푼, 마늘즙 한 티스푼, 무즙 한 티스푼, 배즙 한 티스푼, 양파즙 한 티스푼, 생강즙 한 티스푼, 그리고 진간장 두 스푼.”

불러주는 재료를 믹서에 넣던 친구는 진간장에서 멈칫거렸다.

“진간장? 이런 조합에 진간장이 어울려?”

“나는 이 조합에선 진간장이 좋더라. 짠맛을 조금 더해주는 건데 진간장 냄새가 싫다면 소금을 넣어도 상관없어. 매운맛도 마찬가지야. 고추가 싫으면 와사비(고추냉이)나 겨자를 넣어도 좋고.”

“흠… 진간장 두 스푼, 그리고?”

“홀그레인 머스터드 숟가락으로 가득 두 개!”

“겨자씨? 그 매콤한 겨자 말하는 거지? 고추가 들어갔는데 또 겨자?”

“고추하고 겨자는 매운맛이 다르잖아. 거기에 설탕 열다섯 스푼.”

설탕도 마찬가지다. 백설탕과 흑설탕의 맛이 다르고 정제당과 함밀당의 맛이 다르다. 설탕이 싫다면 꿀을 넣어도 되고 맥아당을 넣어도 상관없다. 그렇게 믹서 3분의 1이 채워졌다.

“거기에 자몽주스 1ℓ를 부어.”

“자몽주스? 전에는 오렌지주스를 넣었잖아.”

“오렌지, 사과, 귤, 포도, 망고, 과채주스까지 시장에 나와 있는 건 다 넣어봤는데 자몽의 쌉쌀한 맛이 이 드레싱에 가장 잘 맞아.”

친구는 자몽주스를 넣고 뚜껑을 덮은 뒤 작동 레버를 돌리고 나에게 다시 물었다.

“이렇게 많은 재료가 들어가야만 드레싱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잖아. 몇 가지는 빼도 되지 않아?”

물론 빼도 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드레싱은 기본적으로 시고 단 맛이잖아. 신맛은 조금 있다 넣을 발사믹식초와 레몬즙, 자몽주스가 합해져서 내는 맛이고 단맛은 설탕과 자몽주스가 합해진 맛인데, 이렇게 네 가지 재료만 넣어 혼합하면 두 가지 맛을 연결해주는 끈이 없는 거야. 시고 단 맛이 따로 놀고 깊이도 없어. 그래서 몇 가지 향신료를 첨가해 연결고리를 만든 거야.”

그림 그리듯, 연주하듯

드레싱이 시고 달아야 한다는 것은 전제이다. 고민은 시고 단 맛을 무엇으로 내느냐에서 시작된다. 신맛을 내는 재료는 무수히 많다. 가장 저렴한 사과식초에서부터 최고급 발사믹식초나 감식초까지 매우 다양한데 내가 선택한 재료는 양조식 발사믹식초다. 발사믹식초 중 저급에 속한다. 이 식초의 맛은 평범한데다 부드럽게 혀를 휘감는 고급 발사믹식초의 맛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레몬즙, 무즙, 생강즙, 배즙, 양파즙을 더해 식초가 갖지 못한 맛을 더했다.

설탕도 마찬가지다. 고급 설탕만 사용한다면 자몽주스를 더하지 않아도 될 테지만 백설탕은 깊은 맛이 없어 자몽주스를 더했다. 여기에 고수, 타임, 바질, 고추, 겨자 등을 더해 신맛과 단맛이 따로 놀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도록 고리를 만든 것인데 이러한 고리가 시고 단 맛을 연결하는 동시에 확장시켜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시고 단 맛을 만들어낸다.

고수가 싫다면 라임이나 레몬, 유자 껍질을 넣을 수도 있고 타임이나 바질은 반드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고추는 반드시 들어가지 않아도 되지만 약간의 매운맛은 혀를 자극해 다양한 맛을 풍부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첨가한 것이다.

“재료가 곱게 갈아지면 발사믹식초 500mℓ와 올리브유를 더하면 완성이야.”

사과와 귤은 시고 달아서 기본적으로 같은 맛이지만, 사과와 귤을 같은 것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모양이 다르고 식감이 다르고 시고 단 맛의 비율도 달라 사과가 귤이 될 수 없고 귤이 사과가 될 수 없다. 같은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이라 할지라도 분수령을 타고 갈라진 물의 맛은 흐름 속에서 달라진다. 참나무숲을 흐른 물은 떫고, 소나무숲을 흐른 물은 달다. 철분이 많은 바위를 타고 흐른 물은 알싸하며 화강암을 타고 흐른 물은 맑디맑다.

맛은 달고 시고 짜고 쓰고 맵고 떫고 감칠맛까지 있다고 말하지만, 색을 일곱 가지로 구분할 수 없고 소리를 일곱 음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맛도 그렇게 단순하게 나눌 수 없다. 맛은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감·연필·크레파스·페인트와 같은 재료로 그림을 그리듯 다양한 재료로 그려지고, 다양한 악기로 협연하듯 연주된다. 맛은 빗소리나 바람소리처럼 너른 들과 숲에서 들려오기도 하고, 달그림자나 오로라, 은하수처럼 검은 하늘에 그려지기도 한다.

상상에서 완성되는 맛

맛을 만들어내는 행위는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달에 가는 꿈을 꾸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학습을 통해 달이 어디에 있고, 지구와 얼마나 떨어져 있으며, 달의 구성 성분이 무엇인지, 중력이 어느 정도이고, 지구에 미치는 인력이 어느 정도인지, 달에 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을 바라보면 치즈라거나, 찐빵이라거나, 토끼라거나, 그녀의 어여쁜 눈썹이라거나, 늑대인간이라거나, 뱀파이어와 같은 것들을 떠올리고 상상한다. 달이 지구의 위성임을 명확히 알고 있으나 여전히 상상의 존재이고 꿈의 대상이다. 빨강은 오로지 하나의 빨강일 수 없고, ‘도’는 오로지 하나의 ‘도’일 수 없듯이 단맛은 육천오백칠십육만사천삼백구십억만 가지보다 더 많은 숫자로 나뉠 수 있다. 상상한 맛을 그리고 연주해보자. 맛은 당신의 상상에서 비롯되고 완성된다.

전호용 식당 주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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