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는 사흘째 쉬지 않고 내리는데 처마 아래 우두커니 선 화분에는 비가 닿지 않는다. 화분에 심긴 율마 네 그루는 환장할 지경이다. ‘뭔 놈의 비가 이리 쏟냐’고 구시렁대며 처마 아래로 비를 피했을 때 마른 흙에 뿌리박고 비를 갈망하는 율마 네 그루가 눈에 들었다. 겨우 한 발짝 밖은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는데 처마 아래는 마른땅이다. 닷새 전, 휑한 가게 앞을 꾸미겠다며 내 손으로 들인 나무들인데 몹쓸 짓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조리에 물을 받아 화분에 주는데 뿌리에만 주기 미안해 뻗은 가지와 잎에도 흠뻑 물을 끼얹어주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저 알아 살아가던 야생의 법칙</font></font>율마야 장마 가운데 가뭄이라지만 길 건너 공원에 선 나무들은 그런대로 살 만한지 잎도 짙푸르고 가지도 중구난방 저 좋을 대로 뻗대며 으스대고 있다. 그 건너, 저 멀리 전주천 너머 굽이굽이 솟고 꺼진 완산칠봉 짙푸른 숲에 안개가 걸쳐 있고, 전주역 뒤편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진안고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늘 희끄무레 뿌옇게 보이던 고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마치 개안한 듯했다.
여기, 그러니까 전주시 금암동 사대부고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다 진안고원이 훤하게 눈에 들어오면 그것은 우연히 보이는 어느 멋진 풍경만은 아니게 된다. 풍경이 눈에 드는 순간, 마음은 고원 안쪽 깊이 틀어박힌 어느 작은 개울가에서 살았던 기억에 닿게 된다. 그래, 나는 멀리 보이는 풍경 안에 살아 있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은 다들 저 알아서 살았다. 멧돼지 새끼도 저 살고 싶은 대로 살았고 오소리도 저 살고 싶은 대로 으스대며 살았다. 저 알아서 뿌리내린 나무들이 옥신각신 하늘 향해 가지를 뻗는 사이 숲이 우거져 고원을 이뤘고, 이 고원으로 찾아든 이백오십육만칠천여 마리(그렇다고 세어본 건 아니다)의 새들은 비 그친 날 아침이면 고원이 들썩거리도록 웅성거리고 지저귀었다. 나는 거기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뛰어다니며 첨벙거렸다. 사람 눈으로 보자면 쯧쯧 혀를 차거나 짐승으로 여기며 공포에 질릴지 모르지만 고원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의 눈엔 살아서 움직이는 또 다른 생명 하나로 보였을 것이다.
고원에 살던 나와 다른 생명들은 살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치는 다른 생명을 쉽사리 해치려 들지 않았다. 언제나 내 주변에 머물러 나를 지켜보며 발모가지라도 접질려 옴짝달싹 못할 날을 기다리는 눈치이기는 했다. 하지만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 크게 소리치며 ‘나 아직 살아 있음’을 각인시키면 되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물 먹은 율마 잎이 말라 있었던 까닭 </font></font>고원에서 내려와 도시에서 살아가는 나는 벌거벗을 수도 소리 지를 수도 없게 되었다. 겨우 한다는 짓이 ‘빤쓰’ 정도 안 입고 사는 거다. 세상살이 어느 정도는 다 견디고 살 수 있겠는데 빤쓰 입는 것은 참말로 고역이다. 겨울에는 바지가 두꺼워 고역이고 여름에는 후텁지근해서 고역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날을 빤쓰를 입지 않고 사는데 도시에 사는 인간이란 생명은 그 꼴도 못 봐주겠는 모양이다. 자꾸 본다. 바지 입고 셔츠 입었으니 벌거숭이도 아닌데 바지춤 아래서 그것을 잘도 찾아내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힐끗거리며 눈여겨본다. 그 시선, 마치 발모가지라도 접질려 옴짝달싹 못할 날을 기다리는 짐승들의 그것과 비슷하다. 남녀노소 별반 다르지 않다. 먹잇감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영역을 침범한 다른 생명체를 바라보는 그 시선 말이다.
짐승은 물리적 영역에 침범한 낯선 자를 경계하는 눈빛일 테지만, 사람은 심리적 영역에 침범한 이방인을 경계하는 눈빛이다. 불편해도 참고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우리와 같은 불편함을 견디지 않는 너는 비난받아 마땅한 이방인쯤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없던 낯선 것을 대하는 시선쯤으로 여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시선의 답답함보다 빤쓰의 답답함이 더욱 불편하니 덜한 것을 사타구니에 차고 다닐 수밖에.
<font size="4"><font color="#008ABD">폭우처럼 쏟아지는 타인의 시선</font></font>서울 사는 그녀는 치마를 입고 집을 나서는 날마다 내가 느꼈던 불편한 시선을 느낀다고 말한다. 바지를 입고 나선 날과는 확연히 다른 그 시선이 때때로 짐승의 이빨보다 더한 폭력으로 느껴질 때가 많은데, 그 시선은 젊은 여자와 늙은 여자를 가리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브라’를 입지 않고 얇은 셔츠를 입은 외국의 어느 모델이 멋져 보이긴 해도 그 시선 앞에선 언감생심. 그녀는 차라리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편이 자존감을 지키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튿날 율마의 잎은 말라 있었다. 잎이 마르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줄기와 잎에 흠뻑 물을 주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율마를 키우는 방법은 이렇다고 한다. 물을 좋아하는 식물이긴 하지만 잎에 물이 닿는 것은 싫어하기 때문에 뿌리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물을 줘야 하고 잎은 분무기로 가볍게 적셔주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살 수 있다고. 율마를 살리기 위해 인터넷을 뒤적거리던 나는 도대체 이런 조건이 자연에 존재하기는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어떻게 멸종하지 않고 지구상에 살아남아 가게 앞 처마 밑에 놓이게 되었을까. 신화 속에나 존재하는 식물 같기도 하고 말로만 들어본 백 년 묵은 산삼 같기도 하다.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어쩌면 율마는 집고양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길 밖으로 내몰면, 고원 어딘가에 땅을 파고 심어놓으면, 집고양이가 길고양이가 되듯,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남아 편백처럼 숲을 이룰 식물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뿌리내리지 못하고 며칠 만에 죽어버릴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비 맞지 않는 도시의 정원과 실내에서 살아가는 데 최적화된 율마라는 식물을 홀랑 벗겨 폭우 속에 내놓으면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릴 것이라고. 그렇게 율마와 편백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고. 여기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식물의 본성을 차단당한 율마일지 모른다고. 목마르지만 물이 싫듯 자유롭고 싶지만 언제나 빤쓰와 브라를 입고 질서라는 처마 아래서 아름다움을 강요받으며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그렇지 않으면 쏟아지는 거친 시선을 맞고 말라죽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라고.
밥상 얘기 하다 뜬금없는 빤쓰냐고 말할 테지만, 식당 앞에 놓인 율마를 내려다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소곳함을 강요받고 살아온 우리가 계속해서 이렇게 살아간다면 율마 같은 식물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이 아름다운 식물이 가진 부조리함이 우리를 꼭 빼닮은 듯해서 이야기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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