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십니까?”
지난해 이맘때 한 남자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오전 10시 무렵이었으니 장사 준비 하느라 정신없을 그런 시간이었다.
“여기가 서울이라 전주까지 갈 수는 없고 궁금한 게 있어서 전화했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한 늙은이의 것이었는데 화가 난 것인지 다급한 것인지 분간하긴 어려웠으나 나에게 호의적이진 않다는 것을 어감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불안하지 않느냐’고 물었다면</font></font>“네, 어떤….”
“그래서 당신은 지금 행복하시오?”
‘그래서’라니. 무엇을 전제하고 행복을 묻는 것이냐 되묻고도 싶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네, 이만하면 행복합니다.”
“행복하다고요? 지금 행복하단 말이죠?”
“네.”
“그렇다면 할 말 없소.”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수화기를 내려놨다. 적의를 품은 천하고 못난 질문임을 직감한 나는 그가 듣고 싶지 않을 만한 대답으로 일갈했던 것이다. 그의 ‘행복’은 공격이었고, 나의 ‘행복’은 방어였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분주하던 주방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도마 위엔 칼과 채소가 볼썽사납게 널브러져 있었고 밥솥은 비린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행복하냐고요? 당신의 질문을 받기 전까진 그랬었죠.’
몇 개월이 지나 같은 질문을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들었다. 이번엔 20대 청년의 질문이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보다는 구체적인 질문이어서 방어적으로 대답할 것은 아니었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청년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반적인 삶을 거부하고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청년이 생각하기에, 보험도 들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결혼하지 않고, 하루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일을 하는데도 행복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나는 청년이 행복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자신이 느끼는 불안을, 무리에서 벗어났을 때 느꼈던 불안을 ‘행복’이라는 질문으로 바꾼 것으로 받아들였다. 청년이 나에게 ‘그렇게 사는 것이 불안하지 않느냐’고 물었다면 ‘불안하지 않다’고 즉답할 수 있었을 테지만 ‘행복하냐’는 질문에는 답하고 싶지 않았고 답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행복은 경지나 목적이 아니다 </font></font>박경리 선생은 1권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수월하게 행과 불행을 얘기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불행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행복하다 한다. 전자의 경우는 여자의 운명을 두고 한 말이겠고 후자의 경우는 명리(名利)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나 싶다. 혹은 잡사(雜事)에서 손을 떼고 일에 전념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인지 모르겠다. 그들 각도에서 본 행, 불행에는 각기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론 노여움을, 때론 모멸감을 느끼며 그런 말을 듣곤 한다.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무궁무진한 인생의 심층을 상식으로 가려버리려는 짓이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류되는 불행, 그렇게 가치 지어지는 행복이라면 실상 그 어느 것과도 나와는 별 인연이 있을 성싶지 않았다.”
행복은 도달한 어느 경지이거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목적일 수 없다. 그대들의 상식으로 나의 행복을 판단할 수 없고 나의 상식으로 그대들의 불행을 예단할 수 없다.
어제까지 나는 매우 고통스러웠다. 목디스크가 재발해 서 있기도 힘겨운데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주문 전화는 하루 종일 끊이지 않고 걸려왔다. 밥을 지어 사람들에게 먹이느라 내 입에 밥 넣을 시간도 없었다. 불어터진 짜장면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한밤중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져 잠들고 눈뜨자마자 일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오늘은 봄볕이 좋은 날이었다. 창으로 드는 밝은 빛에 눈이 부셔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을 활짝 열고 묵은 이불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기름때 묻은 옷과 앞치마를 빨아 널었다. 청소기를 돌려 방에 쌓인 먼지를 훑어내고 물걸레로 방을 닦았다. 점심으로 국수 한 그릇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해 질 무렵 깨어나 겉옷 하나를 껴입고 밖으로 나갔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느릿느릿 걸었다. 레드 제플린의 (Celebration Day)를 시작으로 ‘더 블랙 키스’의 (Lonely Boy), 레이디 가가의 (Bad Romance) 따위의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리며 4km 정도를 걸어 종종 찾는 콩나물국밥집으로 갔다.
콩나물국밥을 먹는 무수히 많은 방법이 있을 테지만 나는 이렇다. 우선 국밥이 나오기 전에 밥 한 공기를 김에 싸서 먹는다. 국밥과 수란이 나오면 수란에 국밥, 국물, 콩나물을 담고 비벼 김을 싸서 먹는다. 그리고 나머지 국밥도 마찬가지로 김을 싸서 먹고 남은 국물을 마저 들이켠다. 5분이면 먹을 수 있다.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엔 김두수의 앨범과 아르보 파르트의
(Alina) 앨범을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비밀스럽게 인터넷창을 열고 오토바이 매매 사이트에 접속해 야마하 Vmax1200 혹은 혼다 X11 같은 올드한 네이키드 바이크를 살펴보며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10대 시절 꿈을 펼쳐보며 가슴이 부풀어오르기도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그 질문만 던지지 않는다면</font></font>오늘 하루가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는 있겠지만 행복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기분이 몹시 상해버릴 것만 같다. 오늘 아침의 그 밝았던 봄볕을 떠올리지 못할 것도 같고 게으른 가장이 휴일에 할 일이란 낮잠뿐일지 모른다며 자조할는지도 모른다. 를 들으며 춤추듯 걸었던 그 길이 초라하고 볼썽사나워 부끄러워질지도 모른다. 국밥을 먹는 방법이 혹여 잘못된 방법은 아닐까 걱정스러워질지도 모르고, 레이디 가가는 삼촌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비밀스럽게 즐기며 수음하는 음악으로 묻어둘지도 모른다. 오토바이는 또 어떻고. 열일곱 살 적 꿈꿨던 허세를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소망이랍시고 간직한, 철딱서니라고는 눈곱만큼도 들지 않은 삼촌의 민낯이 부끄러워 오늘 하루의 소소했던 행복들은 어른이 되기 위한 성장통으로 둔갑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행복하냐고? 당신이 그 질문을 던지지만 않는다면 나는 행복하거나 조금 지치고 힘겨울 것이다. 아프고 배고프고 가난할 테지만 당신들이 분류하고 가치 지어준 행복과는 인연이 없는 그런 행복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전호용 식당 주인· 저자※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font color="#C21A1A">▶ 바로가기</font>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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