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가 없으면 뭐든 말리고 절여야 보관할 수 있다. 그때그때 계절에 맞춰 얻을 수 있는 채소, 과일, 물고기, 고기만 가지고도 얼마간 살아갈 수 있을 테지만 이 나라는 비 오고 눈 내리고 바람 불고 추워지면 땅은 씨앗을 감추고 바다는 파도를 일으키고 짐승들은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린다. 밖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먹고 남은 것을 볕에 널어 말리고 소금·간장·된장·고추장 등에 절여 겨우내 먹고 이듬해, 그 이듬해 봄까지도 필요할 때마다 꺼내 먹었다. 이렇게 저장하는 방법 중 가장 손쉽고 실패할 확률이 낮은 것이 볕에 말리는 것이다. 생선과 고기 말린 것은 포(胞)라 하고 나물 말린 것은 진채(陣菜)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묵나물 또는 묵은 나물이라 한다.
이렇게 말리는 이유야 두말할 나위 없이 오랫동안 두고 먹기 위한 것이지만 묵혀 오래된 것이 더욱 맛있어지기도 하고 생것에는 독이 있어 먹지 못하지만 말린 것을 조리하면 먹을 수 있는 것들도 있으니 보관만이 목적이라 할 수 없다.
겨우 토란대들깨탕이냐고?가령 우리가 흔히 먹는 토란대는 껍질을 벗겨 말린 것을 다시 물에 불리고 삶아 사나흘 물을 갈아주며 담가둬야 먹을 수 있다. 생것을 데쳐 곧장 먹으면 목이 따끔거리고 심한 경우 식도가 마비되기도 한다. 고사리는 새순을 그대로 조리하면 미끈거리는 점액질이 많아 먹기 사납고 너무 연해 씹는 맛을 느낄 수 없다. 끓는 물에 데친 고사리를 볕에 말리고 다시 물에 불려 삶아 맑은 물로 씻어내야 미끈거리는 점액질도 사라지고 쫄깃한 식감과 구수한 맛이 난다. 무청 시래기는 푸른 것보다 한겨울 바람 맞아가며 말라비틀어진 것을 물에 불리고 삶은 것이라야 풋내 없이 구수하고, 표고버섯은 말려야만 맛을 내는 구아닐산과 글루탐산, 향을 내는 레티오닌이 생성돼 맛과 향이 좋아진다. 어디 묵나물만 그러할까. 강원도 진부령에서 눈·비바람 맞아가며 누르스름하게 익은 황태. 그것을 어디 바짝 마른 명태 한 마리의 허울이라 폄훼할 수 있단 말인가. 곤룡포 입은 자도 황태포 맑은 국에 울고 웃었으리라.
말리고, 절이고, 숙성시키고, 발효시킨 음식이 한국처럼 많은 나라도 없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결국 기다림인데 기다리면 특별한 맛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달리 보자면 느긋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나라였는데 어쩌다 빠른 것이 미덕인 나라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장과 젓갈은 담그고 숙성, 발효시켜 완성하는 데 1년을 넘기는 것이 예삿일이다. 술을 제외하면 만드는 데 1년 이상 기다려야 하는 음식은 이 세상에 흔치 않다. 게다가 어디 이제 막 담근 1년 미만의 장을 장으로 쳐주기나 하던가. 맛있다 소리 나오려면 3년은 묵혀야 제맛이 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던가.
껍질 벗긴 채소를 볕에 말리고, 말린 것을 다시 물에 불리고, 불린 것을 삶고, 삶은 것을 물을 갈아주며 사나흘 우려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 말고는 없을 것이다. 무슨 대단한 보양식이라고, 해삼·전복도 아닌 것을, 널리고 널린 푸른나물, 열매, 뿌리 다 놔두고 미쳤다고 그 정성을 들여 만들어 먹는다는 것이 겨우 토란대들깨탕이냐고 기가 차서 물을 테지만 우리는 그러한 수고로움과 기다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구수한 토란대들깨탕 한 숟가락을 입안에 떠넣는다.
그렇다고 토란대들깨탕을 보이차처럼 귀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고, 실론티처럼 역사의 산물이라 포장하지도 않고, 일본의 다시물처럼 시간이 우려낸 맛이라는 둥 어쩐다는 둥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다. 그저 토란대들깨탕 정도는 밥상머리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반찬 나부랭이에 불과한 것으로 여길 뿐이다. 왜냐하면 밥상 위에는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시간과 정성이 담긴 된장찌개와 김치, 장아찌, 묵나물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햇고추장 한 단지에 담긴 시간별것 아닌 한 끼 식사, 찌개백반을 5분 만에 먹어치우고 ‘빨리빨리감옥’으로 달려가지만 아직까진 이런 밥상이어야 밥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모여 산다. 어쩌면 아직까지 우리 몸 안에는 기다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DNA가 살아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는 빠름을 미덕으로 삼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느린 된장국과 묵나물이 절박해 신음하듯 밥을 밀어넣는 모습이 안쓰럽다.
설날 아침에는 가라앉은 공기가 차갑게 느껴지더니 오후 들어 일어선 바람 끝에는 훈풍이 달려왔다. 시절이야 어찌되었든지 간에 때가 되면 훈풍이 불고 그 바람을 타고 몰려온 구름은 봄비를 쏟고야 만다. 그 비에 냉이 성큼 일어설 테고 쑥 푸릇푸릇 돋아날 것이다.
나는 그 훈훈한 바람을 맞으며 매실나무 가지치기를 했다. 20여 년 동안 매년 가지치기를 해줬는데도 높이 자라 키가 머쓱한데 그 20년 사이 어미는 바싹 늙고 고부라져 고개 들고 매실 따기가 고역이란다. 그래서 어미의 손이 닿을 만한 가지만 남기고 매실나무 중허리를 댕강댕강 잘라냈다. 나무를 그리 잘라냈으니 올해 매실 농사는 글러버린 것인데 달리 생각하면 올해 열리는 매실은 크고 굵을 것이다. 그래서 올해 어미가 수확한 매실은 내가 모두 사들여 매실청을 담그고 그것으로 겨울에 고추장을 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추장이라는 하나의 음식은 매실나무 가지치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매화가 피고 매실이 열릴 무렵 고춧모를 심고, 매실이 익기를 기다려 수확하고, 수확한 매실을 커다란 항아리에 담아 매실청이 되기를 기다리고, 고추가 익기를 기다려 수확하고, 수확한 고추가 마르기를 기다려 고춧가루를 만들고, 메주콩을 심어 콩이 나길 기다리고, 콩을 말려 타작하고, 타작한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메주에 곰팡이가 슬길 기다리고, 곰팡이 슨 메주를 씻고 쪼개 볕에 널어 말리고, 말린 메주를 빻아 메줏가루를 만들고, 잘 익은 매실청을 거르고, 보리의 싹을 틔워 엿기름을 만들고, 엿기름을 볕에 널어 마르길 기다리고, 마른 엿기름을 빻아 엿기름가루를 만들고, 물에 불린 엿기름가루를 걸러 엿을 끓이고, 그 엿에 메줏가루·고춧가루·매실청을 넣고 버무려 햇고추장 한 단지를 담가 해 잘 드는 뒤란에 두고 또다시 1년을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는 사이 모아진 것으로고추장 단지 옆에선 간장 단지도 익어갈 것이다. 메주를 넉넉히 만들어 항아리에 가득 담고 그 안에 소금물과 붉은 고추, 숯을 담아 뚜껑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 고추장이 익어가길 기다리며 간장이 익어가길 기다릴 것이다. 소금물에 메주가 우러나 청장이 되면 메주를 걸러 그것으로 된장을 담글 것이다. 고추장 단지와 간장 단지 옆에서 된장도 익어갈 것이다. 고추장이 익은 가을이 되면 감장아찌를 담가 익기를 기다릴 것이고, 간장이 익는 봄이 되면 봄나물 장아찌를 담가 익기를 기다릴 것이고, 된장이 익는 가을이 되면 서리 맞은 풋고추를 박아넣고 익기를 기다릴 것이다. 우리는 크고 작은 항아리가 모여 익어가길 기다리고 또 기다릴 것이다. 그렇게 기다린 것으로, 기다리는 사이 모아진 것으로 밥상을 차릴 것이다. 이렇게 차려진 보잘것없는 밥상이 또 다른 기다림을 가능케 하는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그녀와 나는 믿는다.
전호용 식당 주인· 저자※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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