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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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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이 부끄럽다

권력이 지시하는 부끄러움을 내면화한 우리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을 천하게 여기게 하는가
등록 2016-02-06 02:21 수정 2020-05-03 04:28

몇 년간 등·하교 시간에 오가던 길가에 서 있던 낡고 오래된 빨간 벽돌집이었다. 100년을 오간다 해도 눈여겨볼 이유가 전혀 없을 그런 집이었다. 몇 년을 오갔는데도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그 집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가 많이 내리던 여름날 아침, 빨간 벽돌 한쪽 모서리 부분이 무너져내려 집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무너져내린 벽 안쪽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무너져내리기 직전까지 한 가족이 그 안에서 밥을 먹고 TV를 보고 잠잤을 것이다. 전날 밤 덮고 누워 잠잤을 법한 이불이 비에 젖어 있었고 무너져내린 벽에 닿아 있었을 옷장이 뒤집어지며 쏟아낸 옷가지가 알록달록 누추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김치통이었는지 무엇이었는지 음식물이 쏟아져 게워낸 토사물처럼 질퍼덕거렸다.
누추한 개인의 내면이, 떳떳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울 것도 없을 살림살이가, 삶이, 난폭한 재난 앞에 무차별하게 공개돼 이 세계에 전시되었다. 내 일이 아님에도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끄러움이란 말을 떠올리면 지금도 여지없이 그 광경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집이란 것이, 집을 이루는 벽과 지붕이란 것이 육체의 안전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누추함과 부끄러움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가라앉혀주는 항아리와 같은 역할까지 하고 있다는 것을 무너져내린 빨간 벽돌 안쪽을 들여다보며 생각했었다.

한 아파트 앞에 음식물 쓰레기가 쌓여 있다. 연합뉴스

한 아파트 앞에 음식물 쓰레기가 쌓여 있다. 연합뉴스

<font color="#C21A1A">내 몸에서 떨어진 옷</font>

나는 내가 가진 물건 간수를 못하는 사람이다. 몸에 지닌 무엇을 잘 잃어먹거나 땅에 떨어뜨린다. 주머니에서 뭐가 빠져도 잘 알지 못하고 버스나 기차에 모자, 우산, 지갑, 전화기 따위를 놓고 내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어미에게 늘 꾸중을 들으며 자랐어도 여전히 주의력이 없는 걸 보면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거다. 그래서 뭘 잃어먹거나 있던 것이 사라져도 그러려니 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옷만큼은 그러려니 해지지 않는다. 내가 입고 걸쳤던 옷이나 목도리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몸에서 떨어져나가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벌거벗은 듯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 옷을 집어든다. 흙밭에 뒹굴어도 입고 있던 옷은 툭툭 먼지를 털어내거나 대충 침 발라 닦고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내 몸에서 분리된 옷이 제 마음대로 길바닥을 나뒹구는 꼴을 보면 어쩜 그리도 천해 보이고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일까.

음식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먹이는 일을 업으로 삼은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의문을 품게 되었다. 몇 시간 동안 혹은 며칠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만들어 그릇에 정성 들여 담아낸 음식은 긍정적 에너지의 결정체처럼 여기다가도 대략 30여 분이 지나 먹고 남겨진 음식을 대할 때는 그보다 더 천한 것이 없다는 듯 뭉뚱그려 쓰레기통에 쏟아넣고 뚜껑을 덮어버린다. 그 모든 재료를 손으로 만져 다듬고 썰고 볶고 끓이고 튀겼음에도 불구하고 음식물 쓰레기가 손에 닿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한다. 30분 전까지는 위생적으로 완벽하다고 자부했으면서 30분 만에 그 음식은 매우 비위생적이고 세균이 들끓는 상태로 부패했단 말인가?

성(性)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의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성은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행위였다가도 여차하면 가장 천박한 욕지거리의 주요 테마가 된다. 성행위는 더럽고 깨끗한 것과는 별개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더럽기도 했다가 깨끗한 것이 되기도 한다.

인류의 생활에 필수불가결하고 신성하게 여겨지기까지 하는 의식주와 성을 대하는 태도는 표리부동의 전형이자 인정해버린 모순이다. 아마도 성에 대한 순결주의가 우선했을 것이고 위생학과 결합해 이러한 편견과 내면의 부끄러움을 만들어낸 듯하다.

<font color="#C21A1A">국가, 종교, 기업, 자본, 권력</font>

그 결합의 과정에는 교육이 있고, 국가가 있고, 종교가 있고, 기업이 있고, 자본이 있고, 권력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부끄러움은 박완서 선생이 에서 가르치려던 부끄러움과는 정반대에 있는, ‘부끄러움의 알맹이는 퇴화하고 겉껍질만이 포즈로 잔존’한 학습된 예의, 규범, 도덕 따위의 것들이다. 마치 ‘신자유주의’라는 당대의 사조가 ‘자유’라는 언어를 강간해 제 뒤집어쓰고 스스로를 자유라 말하는 것처럼 가증스럽다.

국가는, 종교는, 기업은, 자본은, 권력은 그렇게 가증스럽게 순결을 교육한다. 깨끗함을 교육하고, 더러움을 명시하고, 명시된 더러움을 비난하고, 명시된 더러움에 손가락질하도록 독려하고, 스스로 더러워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다독여 부끄러움에 대한 자기검열을 실시하도록 인도한다.

나는 왜 내가 입던 옷을 부끄러워하는지, 내가 만든 음식을 불쾌하게 여기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이렇게 표리부동하고 모순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부끄럽거나 불쾌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부끄럽다. 이러한 부끄러움을 포함해 껍질만이 포즈로 잔존한 부끄러움까지도 나의 작고 허술한 빨간 벽돌집은 무너져내리지 않고 가라앉혀줄 수 있을까.

<font color="#991900"><i>
아아,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게 왔다. 전신이 마비됐던 환자가 어떤 신비한 자극에 의해 감각이 되돌아오는 일이 있다면, 필시 이렇게 고통스럽게 돌아오리라. 그리고 이렇게 환희롭게. 나는 내 부끄러움의 통증을 감수했고, 자랑을 느꼈다.
나는 마치 내 내부에 불이 켜진 듯이 온몸이 붉게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내 주위에는 많은 학생들이 출렁이고 그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론 모자라 ××학원, ○○학관, △△학원 등에서의 별의별 지식을 다 배웠을 거다. 그러나 아무도 부끄러움은 안 가르쳤을 거다.
나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펄러덩펄러덩 훨훨 휘날리고 싶다. 아니, 굳이 깃발이 아니라도 좋다. 조그만 손수건이라도 팔랑팔랑 날려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고. 아아,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박완서, 중 </i></font><font color="#C21A1A">무너져내리지 않을 벽돌집</font>

커다란 욕조를 집 안에 들여놓는다. 욕조가 아니더라도 두 사람이 들어앉을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빨간 다라이라도 상관없다. 장을 본다. 아주 많은 양의 장을 봐야 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두부 두 판을 사고 달걀도 두 판 산다. 청포묵은 한 판이면 되겠다. 시금치 한 박스, 큼지막한 무 서너 개, 콩나물 한 시루, 고사리 한 관, 도라지도 한 관, 표고버섯 한 박스, 김 한 톳, 고추장, 들기름, 참깨. 거기에 만두 대여섯 판과 프라이드치킨, 족발까지 사들고 집으로 들어와 옷을 벗는다. 아주 홀딱 벗는다.

그녀와 나는 홀딱 벗은 채 최선을 다해 두부를 지지고, 달걀지단을 부치고, 시금치나물, 무나물, 콩나물, 고사리나물, 도라지나물, 표고버섯나물을 무쳐 욕조에 쏟아붓는다. 밥은 한 가마니 정도 지어야 하려나… 지은 밥도 욕조에 담는다. 묵도 썰어넣고 만두, 프라이드치킨, 족발도 모두 욕조에 쏟아넣은 뒤 욕조 안으로 들어가 앉는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듯 비빔밥 안으로 들어가 밥을 비빈다. 김가루를 꽃가루처럼 흩뿌리고 손과 발을 휘저어 밥을 비빈다. 서로의 몸에 들기름을 발라주고 문대고 핥고 빨며 밥을 비빈다. 비빈 밥을 먹고 입고 덮고 그 안에서 끌어안고 섹스를 하고 잠을 자더라도 부끄럽거나 더럽게 여기지 않을, 손가락질에 무너져내리지 않을, 빨간 벽돌집이 있기를 바란다.

전호용 식당 주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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