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가 고개를 숙이면 가을이 온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던 6월 말부터 막바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오늘까지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냈다. 휴일 없이 일했고 휴가라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작은 공원에 서 있는 나무들은 두 달 전이나 오늘이나 별반 다름없이 푸르기만 하고 들숨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두 달 전이나 오늘이나 별반 다름없이 무덥고 불쾌하기만 하다. 그렇게 식당을 찾는 사람들에게 밥 차려주며 여름을 견뎌내다 어제 오후 한가한 시간에 짬을 내 도시를 빠져나갔다.
산업도로에서 보이는 호남평야는 그저 푸른 것으로만 보였는데 국도로 내려와 한적한 농로로 접어들었을 때 그저 무덥기만 한 여름날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농로 옆으로 펼쳐진 들판엔 이삭이 패고 여문 벼 모가지가 꺾어져 있었다. 무작정 차를 세웠다. 어서 바삐 일을 보고 식당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차를 멈춰 세우고, 다급한 내 마음을 멈춰 세우고, 바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는 도시의 시간을 멈춰 세웠다.
‘5분만.’
햇살을 막아줄 나무 그늘 하나 없는 들길에 차를 세웠다. 햇살은 지독하게 따가웠어도 들에서 일어선 바람은 햇살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선선했다.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의 풍경과 달리 여름을 먹고 자란 벼의 모가지는 꺾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일어 들판을 쓰다듬으면 나락 모가지들이 일제히 건들건들 춤을 추며 놀았다. 이삭의 춤이 시계추처럼 보였고 익어가는 들판이 달력처럼 보였다.
자연을 시계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은 시계와 달력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사뭇 다르다. 가령 시계를 보지 않아도 “분꽃 폈응게 밥 혀야것다”라든가 “제비 왔응게 모 심어도 쓰것네”라고 말한다. “나락 모가지 꺾어졌응게 제아무리 더워도 가실은 가실”일 테고 여린 쑥 고개 내밀면 아무리 매서운 추위라도 ‘다 갔구나’ 생각하며 안심하게 된다.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란 장담이자 안심이다. 아무리 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것임이 분명하다는 장담이고, 열심히 키운 나락 모가지 꺾어졌으면 내 힘 들이지 않아도 저 알아서 여물어갈 것이라는 안심에서 생겨난 말이자 마음의 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나는 어정거리고 건들거릴 여유가 없다. 장담할 수 없고 안심할 수도 없다. 두 달 전이나 오늘이나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고 여전히 무더우므로 붙들고 늘어지는 건 기상청뿐이다. “시원해지기는 개뿔”이라며 이죽거리거나 “또 거짓말이네”라며 빈정거린다.
‘에라 이놈아. 촐랑방정 그만 떨어라. 나락 모가지 꺾어졌다.’
전남 보성 득량 사는 농부가 다녀갔다. 지난겨울 다녀가고 여덟 달 만에 다시 보는데 얼굴은 청동빛으로 그을리고 눈이 퀭하다. 몸은 마르고 머리카락은 검은머리 반, 흰머리 반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재작년 딱 이맘때였다. 득량만 방파제에서 어정거릴 때 농부는 건들거리며 나에게 다가왔었다. 봄부터 이맘때까지 농사지어놓고 나락 모가지 꺾어지자 안심한 거다. 부인과 함께 바닷바람을 쏘이러 나온 그의 낯빛은 편안해 보였다. 올해는 그해보다 무더워서였는지 수척하고 지쳐 보였지만 식당을 찾은 그의 눈빛은 그해와 다름없이 편안해 보였다.
군산 사는 어미도 며칠 전 다녀갔다. 득량 농부나 다름없이 그을리고 마르고 볼품없다. 안 그래도 작은 사람인데 살 빠지고 그을리자 꼬부랑 할매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눈빛은 편안하다. 농사 다 지어놓은 거다. 여름내 풀 매고 북돋워주고 거름 지어 날라 키워냈을 것이다. 더위에 녹아내린 몸이 거름 되고 뜨거운 해 받아 반짝반짝 윤기 흐르는 참깨, 콩, 호박 되었을 것이다. 그것들 거둬들이기 전에 잠시 쉬어가는 참에 친구 보러, 자식 얼굴 한번 보러 다녀가신 게다. 그렇게 쉬고 몸에 기운을 담아 수확을 마치면 그것으로 다시 살을 찌운다. 자신의 살을 녹여 키운 것들을 먹고 살을 찌워 이듬해 봄을 대비한다. 어미는 70년을 그리 살아왔다. 여름이면 살이 빠지고 겨울이면 살이 오르는 모습을 평생 지켜봤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올해는 유난히 수척하고 말랐다. 그만큼 무더웠던 날들을 견디며 키워내느라 살이 녹고 머리가 쇠었을 것이다.
가을이라 부르기 무색하지 않을 들판에 서서 두 농부를 떠올렸다. 그렇게 몸을 녹여가며 농사지었을 사람들이지만 부럽고 또 부러웠다.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반드시 결실을 맺는, 진리에 가까운 명징함을 눈으로 확인하고 안심하며 쉬어갈 수 있는 그들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5분이 지났다.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전화기를 열어 시간을 본다. 늦었다. 겨우 5분에도 조바심이 난다. 조바심에 겨우 하루도 쉬어가지 못하고 조바심에 겨우 5분도 지체할 수 없다. 차에 오른다. 속도를 높인다. 속도로 지체한 5분을 만회하려 애쓴다. 헐레벌떡 도착한 나는 안심 대신 허무를 느끼며 의자에 앉아 냉수 한 컵을 들이켠다. 안심과 허무는 어쩜 그리도 닮은 반대꼴일까.
고향 친구가 도시에서 살아가는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반평생을 도시에서 살았으면서 우리는 어쩌자고 그렇게 약삭빠르지 못하고 느려터진 게냐. 착해빠져가꼬….” “태생이 촌노메 새끼들이라 그렇지. 촌것들이 다 그렇지.” 겨우겨우 견뎌낸다. 촌것들이 참고 견디는 건 또 잘한다.
※‘어정밥상 건들잡설’ 연재를 마칩니다. 좋은 글 보내주신 전호용님과 칼럼을 아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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