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만물 만사 시간과 숨 쉬는 공기까지도 돈으로 계산되어버리는 세상이다. 그러다보니 귀하고 얻기 힘든 것이 돈으로 치면 별것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깊은 가을, 도시의 한복판이라지만 이곳의 계절도 가을인지라 집집마다 담장 안쪽으로 뻗은 나뭇가지에 연시, 대봉시, 석류, 모과, 사과, 대추 등과 같은 과실들이 울긋불긋 소담스럽다. 마당 한편, 채마밭 구석진 자리, 화단 한쪽 구석에 묘목 한 주 심어두고 무심하게 몇 해를 보내면 그 옹색한 땅의 힘을 빌려서라도 기필코 한 덩어리 과실을 맺어내고야 만다.
작고 못나 산지에서 폐기되는 농작물이 있다. 모양새는 볼품없더라도, 가지 끝 기필코 맺어낸 열매 하나의 귀함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한겨레 윤운식 기자
시골에서 나고 자란 촌것들은 탐스럽게 매달린 과실들을 보면 무심하게 지나쳐지지 않는다. 몇 년 전까지 밥벌이했던 인쇄소 뒤뜰엔 앵두나무, 오얏(자두)나무, 대추나무, 감나무가 서 있었는데 그 나무들은 과실수라기보다 조경수에 가까웠다. 늦은 봄날 누구도 손봐주지 않는 앵두나무에 붉은 자태 뽐내가며 다래다래 앵두 열려도 그 탐스러움을 탐하는 자 하나 없이 새들만 득실거렸고, 앵두 지고 오얏나무에 검붉은 피자두 치렁치렁 뽐내봤자 팔 뻗어 그것 하나 따먹는 사람 없어 장맛비에 후드득 콘크리트 바닥 위로 나뒹굴었다. 첫해야 이물스러워서 보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이듬해에도 그러하니 애가 달아 손을 뻗어 입에 넣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거기엔 나 말고도 전북 임실군 성수면에서 나고 자란 박애경이란 촌년도 있었는데 고년 또한 새만 득실거리며 좋아죽는 꼴은 뜬눈으로 볼 수 없는 촌것의 심성이라 익는 대로 중발에, 종이컵에 담아와 나눠 먹었다. 나는 높은 오얏나무 타고 올라가 목덜미에 쐐기 서너 방 쏘여가며 피자두 거둬다 나눠 먹었다. 가을 되면 대추도 후려 먹고 물렁물렁 대봉시도 하나둘 거둬다 입에 넣었다.
손만 뻗으면 곧장 먹을 수 있는 이러한 과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우리는 대부분 잊었거나 알지 못한다. 밥은 벼를 베고 탈곡하고 도정해서 얻은 쌀을 씻어 불 위에 얹어 익히는 과정을 거쳐야만 먹을 수 있다. 고기는 동물의 목숨을 끊고 털을 뽑고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야만 얻을 수 있다. 콩은 익혀야 먹을 수 있고, 물고기는 낚아야 먹을 수 있다. 과실 외에 먹을 것은 대부분 이러한 수고로움을 필요로 하는데 그 수고로운 과정을 돈으로 생략하기에 과일은 고기보다 불편한 것이 되어버렸다. 별것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먼 가지에 매달린 못난 감은 까치에 대한 배려라기보다 버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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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선 ‘감귤 반상회’가 열렸다고 한다. 이유는 한마디로 감귤 가격이 똥값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가지마다 치렁치렁 탐스럽게 열린 감귤을 바라보는 마음이 흐뭇하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감귤 10kg 한 상자 도매금이 1만원을 넘지 못하자 농민들과 관리들이 모여 값을 올릴 방안을 궁리한 것인데 그 해결책 중 하나가 버림이다.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감귤은 수확하지 않고 그대로 땅에 버린다는 것이다. 무엇이건 간에 잘난 놈이 있으면 못난 놈이 있고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이 있기 마련이다. 과실 또한 매한가지 아니겠는가. 예전에는 작고 못난 것은 못난 것대로 모아 저렴한 값에라도 판매했지만 이제는 잘난 것들의 적정한 값을 유지하기 위해 못난 것들은 산지에서 폐기처분하는 모양이다. 그 못난 것들이 유통되면 감귤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결국 소비자는 감귤을 외면한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재고 곡물 수장하자는 기묘한 발상꼭 그렇기만 할까? 불편부당, 감귤을 비롯한 나무가 맺어준 귀한 열매마저도 돈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 안으로 밀어넣었기에 그 올곧은 존재 자체의 가치가 사람으로 하여금 상실된 것은 아닐는지.
몇 해 전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제주 농민에게서 감귤 한 상자를 구매했었다. 그 농민은 선과 작업이나 세척 작업을 하지 않고 손에 닿는 대로 나무에서 감귤을 따고 상자에 담아 발송했다. 박스 안에는 크고 잘난 것과 작고 못난 것이 뒤섞여 있었다. 어떤 것은 시고 어떤 것은 달았다. 어떤 것은 덜 익고 어떤 것은 무르게 익었다. 신 것은 신 것대로 단 것은 단 것대로 맛이 있었다. 귤이란 그런 것 아니던가? 한 나무에서 열린 귤이 모두 크고 단단하고 달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긴, 사람도 생산하고 관리하고 취득하고 상실한다고 말하는 나라에서 못난 과실 따위에 마음이 쓰이는 건 그것을 길러낸 농민과 나무와 땅과 하늘과 해와 바람 나부랭이뿐일 테지.
감귤만 그러할까. 어떤 국회의원은 그랬다지. 국가에서 수매한 벼의 재고 물량이 늘어나고 또다시 올해 수매 물량을 결정해야 하므로 용처가 결정되지 않은 재고분을 바다에 수장하자고. 돈 주고 수매했으니 어떻게 소비하든 뭔 상관이냔 말처럼 들리는데, 그 발상의 전환이 참으로 아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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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새벽, 모과나무에서 모과 한 알이 땅으로 떨어졌다. 매끈한 모과의 한 귀퉁이가 으스러졌다. 가끔 그 모과나무 아래로 산책을 다닌다던 친구는 모과나무에 열린 탐스러운 모과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그 모과 한 알 탐하지 못할 심성이어서 다녀올 때마다 “좋다, 좋다”고만 말하더니 그날 아침에는 모과나무가 친구에게 모과 한 알을 내어준 모양이었다. 산책하던 길에 발견한 떨어진 모과를 손에 들고 가게에 들렀는데, 땅에 떨어져 모양은 볼품없어졌을지 몰라도 그 향기는 탄성이 터져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도마 위에 모과를 올려놓고 칼을 빼들었다. 친구는 고대하는 눈빛으로 내 하는 양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모과를 적당한 크기로 깍둑썰기 하고 모과의 무게와 같은 양의 흑설탕으로 버무려 유리병에 담았다. 그리고 단단히 봉인했다. 친구는 유리병을 깨끗이 씻고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모과차 봉인 풀 날 기다리며시리게 눈 내릴 어느 날 아침, 산책하고 돌아올 친구와 함께 봉인을 풀고 향긋한 모과차 한 잔 나눠 마실 것이다. 오토바이 타고 밥 배달하는 삼촌에게도 따끈하게 한 잔 건넬 것이며 이웃한 부동산 거간꾼과도 그 향기와 온기를 나눌 것이다. 우리 어여쁜 색시 전주로 마실 나오면 언 손에 따끈한 찻잔 들려줄 것이며, 먼 길 달려온 친구가 있거들랑 그 사람과도 나눠 마실 것이다.
돈으로 치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귀한 것일 수도 있다.
전호용 식당 주인· 저자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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