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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루브르에 만화를

엔키빌랄의 <루브르의 유령>
등록 2015-05-16 18:20 수정 2020-05-03 04:28

2005년, 연간 방문객 750만 명을 자랑하는 루브르박물관에서는 프랑스 문화계가 깜짝 놀랄 만한 신규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수준 높은 편집과 실험적 기획으로 유명한 퓌튀로폴리스 출판사와 함께 루브르의 성문을 만화계에 활짝 열겠다고 한 것이다. 이른바 ‘루브르 만화 컬렉션’의 탄생이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루브르의 파브리스 두아르는 “지금까지 완전히 분리돼왔던 박물관과 만화계를 이어주는 다리를 만들고 싶다. 우리는 작가들이 생생하고 동시대적인 대담을 이끌 수 있도록 완전히 자유로운 도화지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그 뒤 10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에는 11명의 개성 넘치는 작가들이 참여해 만화가 가진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중에는 과학(SF) 만화의 거장 엔키 빌랄도 함께하고 있다.

국내 독자들에게는 엔키 빌랄이라는 이름이 낯설 수도 있지만, 그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를 비롯한 수많은 SF 영화에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중반 만화계에 데뷔한 빌랄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형식, 강렬하면서도 충격적인 그림, 그리고 전체주의·종교·환경오염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내용으로 어두운 미래상을 그려왔다. 그의 작품은 하나같이 거칠다. 엔키 빌랄은 파괴를 통해 재창조를 이야기하는 작가다.

(열화당 펴냄)은 이런 빌랄이 루브르로부터 ‘백지수표’를 받고 박물관 휴관일마다 회랑을 성큼성큼 돌아다닌 결과물이다. 사실 빌랄은 루브르에 대해 특별한 추억이 있다. 10살 무렵 유고슬라비아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그는 ‘지독하게 고독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우울한 마음을 루브르를 드나들면서 달랬다고 한다. 루브르는 그에게 놀이터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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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400여 장의 사진을 찍고 다시 22개를 선정해 그 시대를 꼼꼼히 조사했다. 그리고 명작이라 칭송받는 작품들의 사진 위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크릴과 파스텔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색은 차갑고, 선은 여성적이다. 그는 고통스러운 눈빛과 창백한 얼굴의 유령을 탄생시켰다. 숨 막힐 듯한 과거의 향연 속에서 유령을 느꼈다는 것은 어쩌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작품에 얽힌 유령의 사연은 사실 같다는 느낌을 주는데, 이는 치밀하게 재구성된 과거를 바탕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빌랄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계를 충돌시켜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켰다. 감히 루브르의 작품에 만화를, 유령을 그려넣은 것이다. 우리가 작품 자체에만 얽매일 때, 그는 허구를 접목해 또 다른 루브르를 창조했다. 엔키 빌랄은 이야기한다.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저는 모두가 기대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슬기·이하규(해바라기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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