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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세상은 소란하기 짝이 없더군

밤의 고독과 나
등록 2014-11-06 15:20 수정 2020-05-03 04:27
신소윤 제공

신소윤 제공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만세. 나이는 만 3살. 서울에서 태어났다.

하루 20시간의 소중한 수면 시간을 쪼개서 내가 왜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앉게 되었는지 묻는다면 게으른 집주인 때문이라고 하겠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는 맡기지 못할지언정(잉? 뭔가 틀린 비유 같지만 넘어가자, 처음이니까) 제 할 일을 넘기는 이 뻔뻔한 작자에 대해서는 언젠가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된 이상 첫 회이니만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다음과 같다.

나의 일상은 대체로 자거나, 먹거나. 장롱 속이나 침대 아래 같은 어둡고 고요한 곳에서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사랑한다. 그렇게 한잠 자고 일어나면 머릿속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리는 기분이다. 때때로 내가 장롱이나 침대 아래 기어 들어가 있는 것도 모르고 집주인이라는 작자가 방문을 꼭꼭 닫아놓고 외출하면 당황스럽긴 하지만. 밥그릇에 와르르 사료 쏟아지는 소리를 사랑한다. 가끔 같이 사는 개 밥도 뺏어먹는다. 세상에 맛있는 건 왜 이렇게 많지? 하지만 생선은 싫어한다. 고기는 좋아한다, 많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움직이는 것, 날아다니는 것을 붙잡는 것도 좋아한다. 나는 축 처진 배와 거대한 엉덩이를 가지고도 늘 사냥 본능을 놓지 않는다. 고양이는 현실에 존재하는 것만 좇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붙들려고 부단히 애쓰는 인간들보다 내가 나은 이유다.

인간 넷, 그리고 개 한 마리와 함께 산다. 이들에 대해서도 차차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생후 2개월에 독립하기 전까진 나도 엄마·아빠, 그리고 같이 태어난 형까지 네 식구였다. 그때 우리를 먹이던 인간 집주인이 네 마리는 무리라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우리 형제를 각자 다른 집에 보냈다. 형은 나와 똑같이 생겼는데, 얼굴에 점이 하나 있다. 인간세계에서 몇 년 전에 주인공이 얼굴에 점 찍고 나타나 불꽃 연기를 펼친 드라마가 화제였다는데, 아무렴 점 하나 찍으면 다른 사람, 아니 다른 고양이 맞아요.

지는 해를 등지고 창가에 앉아 있노라면 집주인이 다가와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너는 세상 이치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아”라고 말하곤 한다. 햇볕이 내 흰 털에 반사돼 후광처럼 비치는데 이때는 내가 봐도 좀 고양이의 신이랄까, 뭐 그런 것처럼 보인다. 동공을 실처럼 가늘게 만들어 가만히 세상 돌아가는 걸 들여다보다보면 뭐 진짜로 다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키, 밤의 고독을 즐기며 자판을 두드리다보니 수다가 길어졌다. 뭐 그러니까 이 연재는 이런 얘기들, “발이 네 개 있는데도 두 개밖에 사용하지 않는 것부터가 사치”스러운 인간들의 세계에 어쩔 수 없이 스며들어 사는 고양이의 묘생일기다. 나는 오늘도 별일 없이 살지만, 인간 세상은 늘 소란스럽기 짝이 없더군. 그런 이야기라고.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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