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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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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마을 밥 선수들 모여 가마솥 경연

<타작밥> 돌아서면 먹고 돌아서면 배 꺼지는 타작하는 날 먹는 밥…
밥 양이 많아 아무나 못해, 밥 선수들은 저마다 방법이 달라 은근히 신경전
등록 2014-10-18 15:54 수정 2020-05-03 04:27
타작할 때가 얼마 남지 않은 누런 들판. 한겨레 김봉규 기자

타작할 때가 얼마 남지 않은 누런 들판. 한겨레 김봉규 기자

어두니골에서 열심히 산 보람이 있어 우리 집은 가족의 소원인 다수리에 2칸 마루가 있고 큰 마당이 딸린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어두니골에서 다수리 논농사를 짓느라고 허리가 휘도록 짐을 지어 나르며 농사하던 아버지의 일이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어머니도 어두니골에서는 1년 가야 이웃에 한번 가기 어려웠는데, 다수리로 이사 오니 이웃집들이 붙어 있어 서로 보고 얘기도 하고 일하는 게 노는 것 같다고 좋아하십니다.

다수리로 이사 와서 첫 타작을 하는 날입니다. 타작날은 1년 중 가장 기쁘고 큰 잔칫날입니다. 타작날을 받아놓으면 3일 전부터 술꾼들은 거 곡물 좀 한잔 달라고 들락거려서 더 바쁩니다. 썰렁하고 추운 새벽 3시에 일어나 술국을 끓이고 막걸리를 거르고 점심밥 준비를 합니다. 여러 가지 줄콩을 까놓고 팥을 중간이 툭툭 터지도록 삶아 설탕을 넣고 소금도 조금 넣고 시루팥떡에 들어갈 팥같이 떡팥을 만들어놓습니다.

타작하는 날은 일꾼들이 새벽 4시에 술국(술과 국)을 먹고 시작합니다. 동네 어르신들은 아침 일찍부터 사랑마루에 와서 진을 칩니다. 큰 마당에 탈곡기 4대를 마주 보게 설치합니다. 탈곡기는 와롱기계라고 부릅니다. 멀리 논부터 집 주위에 날라다 쌓아놓은 볏단들을 마당에 들여놓고 발로 밟으면 탈곡기는 ‘와롱와롱’ 하며 돌아갑니다. 기계 하나를 6명이 한 조가 되어 맡습니다. 볏단을 들고 노련한 솜씨로 이리저리 뒤집으며 터는 사람이 2명, 양쪽에서 볏단을 집어주는 사람이 2명, 알곡이 털린 짚단을 주워내는 사람이 2명입니다. 볏단에서 빠지는 벼이삭과 큰 검불들은 깍지(갈퀴)로 긁어내 옆에서 도리깨로 터는 팀도 있고, 쭉정이와 검불을 댑싸리 빗자루로 벼에 섞이지 않도록 걷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당에 기계 4대가 동시에 돌아가면 무지 시끄럽고 먼지도 많이 납니다. 양쪽에서 털기 시작하면서 누런 황금색 볏단을 마당 중간에 쌓습니다. 저녁때가 되면 산처럼 쌓여 양쪽이 서로 보이지 않습니다.

아낙네들은 아낙네들대로 바쁩니다. 아침도 먹여야 하고 참도 먹고 점심은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먹고,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잘 먹어야 하는 날입니다. 힘을 많이 써서 돌아서면 먹고 돌아서면 먹습니다. 방금 타작한 쌀 다섯 말을 큰 대야에 나눠 담아 여럿이 펌프가에 둘러앉아 씻습니다. 큰 함지박에 여러 사람이 교대로 물을 펌프질해 퍼올립니다. 옆에는 빈 항아리를 여러 개 놓고 쌀뜨물을 알뜰히 받아 나중에 소나 돼지에게 줍니다. 큰 대나무 바구니와 곤주럭 싸리로 엮은 광주리 여러 개를 준비해놓고 쌀을 건져 물을 빼 가마솥 옆에 날라다 놓습니다. 열두 동이들이 가마솥에 물을 많이 붓고 설설 끓입니다. 불 담당 한 명이 아궁이를 지키고 최대한 잘 타는 나무로 불을 땝니다.

나이가 지긋한 네댓 명이 가마솥가에 둘러서서 바가지로 부지런히 쌀을 퍼서 가장자리부터 솔솔 안칩니다. 가운데는 맨 나중에 쌀을 안치고 안 끓는 부분은 주걱 자루로 꾹꾹 찔러 골고루 끓게 합니다. 물이 많으면 밥 위의 물을 바짝 짜내고 미리 준비한 떡팥을 다 되어가는 밥 위에 솔솔 뿌린 다음 삼베 보자기를 덮고 나무 뚜껑을 덮습니다. 불을 빨리 치워야 밥이 타지 않고, 고소하고 보기 좋은 노르스름한 누룽지도 만들 수 있습니다.

밥 양이 많아 아무나 못합니다. 윗동네 밥 잘하는 선수가 있고 중간마을 선수도 있고 아랫마을 선수들도 있습니다. 밥 잘하는 선수들 방식이 저마다 달라 은근히 신경이 쓰입니다. 윗동네 선수 아줌마는 밥은 잘하는데 꼭 쌀이 가라앉았다고 주걱으로 밥을 휘젓는 버릇이 있어 이번 타작밥을 할 때는 어머니가 주걱을 꼭 쥐고 내놓지 않았습니다. 떡팥은 위에 안치고 김만 올려 하얀 밥에 솔솔 섞어 퍼야 모양이 좋습니다. 밥하는 중에 팥과 밥을 다 섞어버리면 지저분해질까봐 어머니는 나무 뚜껑을 덮은 다음에야 주걱을 내려놓았습니다.

아주 구수한 밥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합니다. 반찬 없이 밥만 먹어도 맛있는 타작밥입니다. 귀한 자반고등어도 머리는 떼놓고 한 솥 지졌습니다.

점심을 먹고는 가마솥 누룽지를 간식으로 먹습니다. 가마솥 밑바닥의 누룽지만 남기고 밥은 알뜰히 퍼냅니다. 누룽지 위에 설탕을 조금 뿌리고 나무 뚜껑을 덮고 솔갈비(낙엽진 솔잎)로 불을 솔솔 때면 ‘빠작빠작’ 하는 소리가 들리며 밥 눋는 냄새가 납니다. 이때 불을 치우고 조금 있다가 열어보면 온 가마 밑면의 누룽지가 통째로 들고일어나 있습니다. 큰 놋쇠 주걱으로 가장자리를 살살 떠들어 서너 사람이 통째로 들어 큰 채반에 꺼내놓습니다. 와아~ 다들 둘러서서 뜯어먹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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