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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묵 처먹고 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연극 주연을 맡았다고 다섯 말이나 되는 묵거리로 도토리묵을 만든 승호 어머니
등록 2015-09-19 17:27 수정 2020-05-03 04:28
한겨레 김봉규 기자

한겨레 김봉규 기자

구경거리가 없던 시절 추석 때면 동네마다 연극을 했습니다. 가을걷이로 가장 바쁠 때인데도 청년들은 동네 사랑방에 모여 연극 연습을 합니다. 밤낮 너무 바빠서 코피 터지기가 일쑤였습니다. 어떤 동네는 연극을 출중하게 잘해 평창극장에서 2~3회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청춘 남녀 사랑 이야기를 하여 주연이 실제 결혼하기도 했습니다. 다수리에서도 연극을 하면 자기가 주연을 맡아 장가를 가야지 하고 총각들은 내심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든 층에서 효 사상을 심어줘야 한다며 할미꽃 전설 이야기를 택했습니다. 다들 꼬부랑 할머니 역은 안 하겠다고 합니다. 평소 웃기기를 잘하는 아랫마을 승호가 할머니 역을 맡았습니다.

승호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주연을 맡았다고 연극 뒤에 먹을 야식을 만들기 위해 산에 가 도토리를 주워 나릅니다. 낮에는 주워오고 밤에는 일일이 껍질 까기를 몇 날 며칠 하여 다섯 말이나 묵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아, 우리 승호가 뭔 할머이 역을 맡았다잖아유. 갸가 그렇게 싱거워요. 누가 묻지도 않는데 사람들 만나면 붙잡고 얘길 합니다.

추석 전전날 승호 아버지와 어머니 둘이 디딜방아에 찧으면서 얼레미로 쳐서 묵거리를 만듭니다. 하루 종일 물 맷돌질을 하여 곱게 갑니다. 추석 전날은 새벽부터 묵을 쑵니다. 후지 물(묵거리를 담았던 그릇을 헹군 물)부터 끓입니다. 처음부터 된 가루를 넣으면 젓기가 힘듭니다. 묽은 물이 끓기 시작하면 된 가루를 부으면서 부지런히 젓습니다. 잘못하면 덩어리가 져서 고운 묵을 만들 수 없습니다. 승호 아버지가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박죽(박으로 만든 주걱)을 두 손으로 들고 한쪽 방향으로 부지런히 젓습니다. 이런 음식을 만들 때는 승호 아버지가 잔소리를 들어가면서 조수 노릇을 합니다.

묵이 풀떡풀떡 끓을 때는 긴팔 옷을 입어야 합니다. 원수처럼 고개를 돌려 묵가마를 외면하고 열심히 젓습니다. 묵리 화산처럼 폭발적으로 튀어올라 얼굴에 크게 화상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참을 끓이다가 박죽으로 떠서 흘려보아 주르륵 흐르면 묽은 것이고 천천히 뚝뚝 떨어지면 농도가 맞는 것입니다. 끓기 시작하면 인내심을 가지고 한참 저어준 다음 불을 치웁니다. 묵가마가 너무 달아 있어서 불을 치우고도 한참을 저어준 다음에 뚜껑을 덮어 뜸을 들입니다. 마지막 마무리를 잘못하면 눌어붙어 화독내가 날 수도 있고 뜸을 덜 들이면 흐실흐실 부서지거나 입에 들러붙어 맛이 없습니다.

떫은 물을 빼지 않고 묵을 쒔기에 묵모를 잘라 함지박에 물을 담고 담가놓습니다. 다음날 물이 벌겋게 우러났습니다. 하루 종일 한 두어 번 물을 갈아주면 너무 떫지도 않고 밍밍하지도 않은 맛있는 묵이 됩니다. 승호 아버지와 어머니는 추석날 놀지도 못하고 묵을 채칩니다. 생배추를 슬쩍 절여 쫑쫑 썰어서 참깨보생이, 파, 마늘, 고춧가루, 들기름 넣고 꼬미(고명)를 만듭니다. 조선간장에 파, 마늘, 매운 고추, 참깨보생이, 고춧가루 넣고 양념간장도 만듭니다. 이것저것 실으니 니아까(리어카)로 하나 됩니다.

추석날 저녁입니다. 비가 올까봐 노심초사 고민했는데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떴습니다. 학교 운동장 무대에는 호야 불을 여러 개 매달아 불을 밝히고 운동장에는 구경꾼들이 달빛 아래 모여듭니다. 마지막 막이 오르자 무릎이 귀 뒤로 넘어가도록 꼬부라진 하얀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습니다. 죽기 전에 딸들을 보고 죽어야지, 어려서부터 홀어머니를 잘 모시겠다던 큰딸네 집으로 꼬부랑꼬부랑 억지로 걸어서 갑니다. 큰딸은 문도 열어주지 않습니다. 무대 위에서 종이 눈이 나리고, 무대 양쪽에서는 몇 사람이 키를 부쳐 바람의 효과를 냅니다. 둘째딸네 집에서 막내딸네 집으로 가는 길은 발이 떨어지지 않고 지팡이에 매달려 제자리걸음을 하다시피 합니다. 눈보라 치는 고갯마루에서 모기 소리만 하게 아가야 아가야 부르다 그대로 엎어져 숨을 거둡니다.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승호 어머니도 많이 울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사회자가 광고를 합니다. 알려드리겠습니다. 승호 어머니가 도토리묵을 많이 해왔으니 관계자분들은 한 분도 빠지지 말고 묵 (간장) 쳐(처)먹고 가시길 바랍니다. 꼭 드시고 가십시오.

묵 처먹으란 말에 사람들이 눈물을 닦다 말고 우르르 웃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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