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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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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이 국이 좋기는 도야지 내장국이 좋지

보름 미리 잔치에 남정네들 모여 돼지를 잡고 아낙네들 모여 국 끓이니, 기분이 좋아져 소리가 절로
등록 2016-01-14 18:38 수정 2020-05-03 04:28
정용일 기자

정용일 기자

보름 3일 전쯤 우리 동네에서는 잘 키운 돼지 한 마리를 잡아 동네 사람들이 자기가 가져가고 싶은 만큼 돈을 내고 고기를 나누어 가집니다. 남은 내장으로는 내장국을 끓여 동네 보름 미리 잔치(전야제)를 합니다. 올해는 우리 집 돼지를 잡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돼지를 잡을 줄 몰라 도살장에서 일했다는 사람을 불러서 잡았습니다. 돼지를 잡아주는 대신 내장과 머리와 선지를 가지고 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내장국이 맛있는데 못 먹게 되었다고 무척 아쉬워했습니다. 동수씨가 다음해에는 자기가 돼지를 잡겠다고 합니다. 잡는 것을 유심히 봤는데 자기도 잡을 수 있겠다고 후년에는 내장국을 끓여 먹자고 하여 시작한 것이 이제는 보름 전에 내장국을 먹는 것이 동네 연중행사가 되었습니다. 새벽부터 동네 힘있는 남정네들이 모여 강변에 가마솥을 걸고 물을 끓이고 돼지를 잡습니다.

사람들이 돼지고기에 기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돼지를 잡으면 돼지내장국밥 한 그릇 먹으려고 1년을 벼릅니다. 돼지 잡는 날이면 저 아랫마을에 사는 할머니도 오십니다. 윗동네 사는 할아버지도 지팡이를 짚고 꼭 오십니다.

돼지를 잡으면 우선 돼지머리부터 가마솥에 푹 삶습니다. 삶은 돼지머리에는 고기가 많고 쫄깃거리기도 하고 부위마다 여러 가지 맛이 나는 고기가 참 많기도 합니다. 마음 급한 남정네들은 푹 삶아진 머릿고기를 안주하여 막걸리를 한잔씩 합니다.

머릿고기를 뜯으면서 뼈다귀는 휙 던졌습니다. 갑자기 왜개개객 깨깽깽 왕앙앙 앙그르르, 개소리가 납니다. 아이구, 깜짝이야. 웬 개새끼들이 이리도 많나. 콧등을 찡그리고 송곳니를 드러내고 뼈다귀를 끝까지 놓지 않던 개한테서 피가 흐릅니다. 하필이면 별나게 개를 좋아하는 근태씨 개가 물렸습니다. 근태씨는 씩딱거리며 이 바보 같은 개새끼, 하며 개를 끌고 갑니다. 여보게, 개가 싸울 수도 있지, 좋아하는 내장국은 먹고 가게. 이 사람 저 사람이 불러도 그냥 가버렸습니다.

돼지 내장은 굵은 싸릿가지에 한쪽 끝을 씌워 뒤집어 똥을 털어내고 맑은 물에 헹궈 밀가루를 넣고 한참을 치대 깨끗이 씻어야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돼지머리 삶는 가마에 내장도 함께 넣고 삶습니다. 펄펄 끓는 국솥에 빨갛고 징그러운 선지를 바가지로 살며시 퍼부으면 고깃덩이처럼 아주 연하게 뭉쳐집니다.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내장국을 끓이고 한쪽에서 밥도 하고 김장김치도 썰어 놓습니다. 삶아진 내장과 선지를 건져서 썰고 준비합니다. 토란대, 고사리, 배추시래기, 무시래기 삶은 것, 대파, 고추장, 막장, 고춧가루, 들깻가루, 마늘에 오래 묵은 조선간장으로 짭짤하게 무칩니다. 고기도 양념에 무쳐 넣습니다. 양배추는 생으로 몇 통 썰어 넣습니다. 아주 큰 가마솥이 뻑뻑하게 하나 끓입니다. 누가 다 먹지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이 끓였습니다.

방마다 서로 어깨가 닿도록 빽빽하게 둘러앉아 막걸리도 한잔 하면서 이렇게 맛있는 내장국은 처음 먹어본다고 다들 즐거워합니다. 먹거리를 열심히 장만한 어머니만은 돼지내장국을 입에 대지 않으십니다. 모두들 이렇게 맛있는 국을 왜 안 먹느냐고 야단입니다. 어머니는 돈 때문에 돼지를 잡기는 하였지만 얼굴 아는 짐승을 어떻게 먹느냐고 숟갈을 대지 않으셨습니다.

모두 기분이 한껏 좋아져 소리가 저절로 나옵니다. 소리 잘하는 수희 어머니가 좋은 타령을 하겠다고 합니다. 국자를 마이크처럼 들고 ‘낭군이 낭군이 좋기는 총각 낭군이 좋고/ 수건이 수건이 좋기는 모달리 수건이 좋고/ 국이 국이 좋기는 도야지 내장국이 좋고/ 달이 달이 좋기는 보름달이 좋고~’ 참벌 날아가는 소리로 좋은 타령을 끝없이 합니다.

생전 말씀이 없으시던 노지원 할아버지가 중절모자를 쓰고 일어나서 ‘죽장에 나까우리(원가사는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 넘어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소리를 하실 줄 알았는데, 유행가를 잘 부르셔서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달이 떠도 갈 생각들을 안 합니다. 앞산에 걸린 달은 님의 얼굴을 닮았고 장마에 등걸 토막 떠내려가듯이 구불렁 구불렁 흥겹게 춤을 추며 보름 미리 잔치는 계속됩니다.

전순예 1945년생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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