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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아, 전나무물을 해먹게

전나무물: 육이오 때 큰 돌에 깔려 몸을 못 쓰게 된 팔불출 할아버지, 전나무잎 따러 갔다 기별 없던 아내 보자 벌떡 몸을 일으켰는데…
등록 2015-11-12 20:38 수정 2020-05-03 04:28
한겨레 조홍섭 기자

한겨레 조홍섭 기자

사람들은 송일원 할아버지를 팔불출 또는 전나무물 할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송일원 할아버지는 입만 벌렸다 하면 자기 아내 얘기를 합니다. 또 누가 아프기만 하면 전나무물을 해 먹으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육이오가 끝나고 아군 선발대가 동네를 지나면서 빨갱이와 내통한 사람을 찾아 총부리를 겨누고 위협했습니다. 그 사람은 혼자 죽기가 억울해서 친하게 지내던 착한 송일원씨와 몇 사람을 손가락질했습니다. 송일원씨 부인은 남편과 마을 사람들을 끌고 가는 군인들 뒤를 숨어서 따라갔습니다. 군인들은 총알도 아깝다고 돌로 때리고는 큰 돌을 굴려 눌러놓고 갔습니다. 송일원씨 부인은 돌무덤을 헤치고 송일원씨를 찾아 돌을 굴려내고 번쩍 들어 남편을 둘러업고 집으로 왔습니다.

송일원씨는 가끔씩 숨만 쉴 뿐, 산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미음을 끓여 멀건 물을 입에 흘려 넣습니다. 무슨 약이나 의원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른들이 은절 들고 담 걸릴 때 먹던 전나무물밖에 먹여볼 것이 없습니다.

송일원씨 부인은 있는 힘을 다해 산에 가서 전나무 연한 잎을 따옵니다. 전나무잎을 깨끗이 씻어 돌절구에 팡팡 찧어서 물을 붓고 삼베 보자기를 눌러 덮어 장독 위에 올려놓고 밤이슬을 맞혀 삼베 보자기 위로 고인 물을 먹입니다. 한 달을 미음과 전나무물을 먹였더니 송일원씨는 자기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 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 큰 돌을 굴려내고 남편을 업고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합니다.

전나무잎을 삶아 건져내고 개똥집을 넣고 술을 만들어 석 달만 먹으면 묵은 담까지도 다 낫는다고 합니다. 하루는 송일원씨 부인이 술을 만들려고 욕심내 전나무잎을 좀 많이 뜯어 이고 오다가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주저앉았습니다. 보자기를 베고 누웠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칠흑같이 어두운 밤입니다. 지척이 보이지 않습니다. 호랑이가 얼굴을 핥고 있습니다. 이 산에 호랑이가 있다더니 아마 호랑이가 나를 잡아먹고 있나보다. 꼼짝없이 죽었구나. 한두 달만 더 고생하면 남편이 건강해질 텐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송일원씨 부인이 애달파하는데, 호랑이가 낑낑~ 하며 워리 같은 소리를 냅니다. 어두워도 안 오니 워리가 찾아왔습니다. 워리의 목을 끌어안고 어둠 속에서 마음 놓고 엉엉, 산이 떠나가라 울었습니다. 속이 후련해졌습니다. 한바탕 마음껏 울고 나니 힘도 생겼습니다. 워리가 따라오라고 낑낑거리며 앞장서서 갑니다. 워리가 뒤돌아보면 두 눈에서 불빛이 나옵니다. 전나무잎이 든 보자기를 이고 한발 한발 더듬거리며 워리를 따라 집으로 왔습니다.

송일원씨는 아내가 없는 밤이 무섭습니다. 아내를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무리 애써도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아내가 다쳐서 못 오나, 혹시 호랑이가… 무슨 방정맞은 생각을 하는 거여. 도망갔구나. 그래, 나라도 도망가겠다. 도망을 갔더라도 건강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워리는 두고 가지, 워리까지 데리고 가나. 아니야, 워리는 데리고 가려고 안 했어도 어미처럼 여기니 따라갔을 거여. 나는 우찌 살아서 아내를 고생만 시켰나… 영양가 없는 생각이 끝없이 오고 갑니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번쩍하더니 워리가 나타났습니다. 아내가 둥둥산 같은 보따리를 이고 워리 뒤에 나타났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움직일 수 없었는데, 아내를 보자 송일원씨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아내 목을 얼싸안고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습니다. 전나무잎 개똥집 술을 해 수시로 먹습니다. 송일원씨는 건강해져서 팔불출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팔불출 할아버지는 환갑이 지났는데도 젊은 사람들과 품앗이를 같이 합니다. 누구네 일이든지 자기 집 일처럼 열심히 합니다. 저녁은 두 몫을 싸달라고 하여 집에 가서 꼭 할머니와 같이 먹습니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다보니 맨 결리고 아픈 사람들뿐입니다. 누가 어깨만 두드려도 이 사람아, 전나무물을 해먹게, 전나무물을 먹으면 묵은 담도 다 낫는다네, 권합니다.

팔불출 할아버지는 산에 가서 직접 전나무잎을 뜯어옵니다. 팔불출네 할머니는 돌절구에 팡팡 찧어서 전나무물을 만들어 먹입니다. 팔불출 할아버지는 전나무물과 아내가 있어 열심히 일하고 행복한 말년을 삽니다.

전순예 1945년생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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