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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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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 이미 ‘귀곡산장’… 희망은 변방에서 일어난다

정치공동체의 ‘중앙’이 붕괴된 뒤 찾은 선흘마을
연합·관계해서 ‘사회’ 만드니 새 세상이 열렸다
등록 2025-01-19 08:16 수정 2025-01-24 08:03
고목낭(김인자) 할망의 그림. 할망의 그림에는 언제나 머리에 버섯이 돋아나 있다. “두 존재가 만나 하나의 무대를 만든다”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의 의미가 완벽하게 형상화돼 있다. 소셜뮤지엄 제주 제공

고목낭(김인자) 할망의 그림. 할망의 그림에는 언제나 머리에 버섯이 돋아나 있다. “두 존재가 만나 하나의 무대를 만든다”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의 의미가 완벽하게 형상화돼 있다. 소셜뮤지엄 제주 제공


 

다시 광장이 뜨겁다.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시민들이 광장에 나섰다.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온몸을 은박으로 감고 초현실적으로 싸우고 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옷깃을 여미게 될 정도로 숭고하다. 남태령에서부터 한남동의 초현실적 ‘키세스’ 투쟁까지, 모든 것이 새롭다. 어둠은 짙지만, 광장에 옛것이 물러나고 새로운 것이 도래하고 있다. 광장에서 사람들은 87년 체제의 연합 방식을 넘어서 새롭게 ‘연합’(‘연합’의 의미는 글 후반부에서 구체적으로 쓴다)하기 시작했다.

 

할망들의 작품들엔 ‘홀로’가 없어

학생들과 광장에 나타난 존재의 새로운 방식, 관계/연합의 새로운 양상을 배우기 위해 ‘기막힌 신들의 세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제주도 선흘마을을 찾았다. 미술작가 최소연과 그 친구들이 만든 ‘소셜뮤지엄 제주’에서 선흘마을 할망들과 함께 작업한 이 전시회를 관람하고 할망들과 함께 드로잉 워크숍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광화문으로 가지 않고 왜 뜬금없이 제주 선흘마을이냐고 묻겠지만 중앙에서 광장의 2030 여성들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된 것이 ‘변방’에서는 이미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배움은 시작부터 학생들을 뒤흔들었다.

“삼춘(제주도에서 윗사람을 부를 때 쓰는 표현), 제 로즈메리에서도 향기가 나나요?”

“아니. 안 나. 친구가 없잖아.”

할망의 대답을 들은 학생은 충격을 받았다. 선흘마을 초록 할망의 그림에는 항상 로즈메리가 있다. 작품을 본 관객들은 그림에서 로즈메리 향기가 난다고 신기해했다. 그러자 드로잉 워크숍에서 초록 할망과 함께 작업한 이 학생은 자신의 그림에서도 향기가 나는지 궁금해 할망에게 물었는데 뜻밖에도 향기가 나지 않으며 그 이유는 학생의 그림에는 잘 그린 로즈메리만 있지 친구가 없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초록 할망의 그림에는 로즈메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존재들이 함께 있다. 다른 할망들의 작품들에도 홀로 있는 존재가 거의 없다. 나아가 그저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들이 ‘관계’하고 ‘연합’해 있다.

생각해보면 동시대는 파편화된 개인이거나 국가적 방식 혹은 시장적 방식의 ‘조직화’만 남았지 사회적 방식의 ‘연합’은 놀랄 정도로 후퇴하거나 사라졌다.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일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며, 지속하기 위해 정성을 들여 상호작용하며 소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시대인들은 홀로 있는 파편화된 존재로 숨어버리거나, 서로를 상품으로 소비하는 시장적 방식 또는 권력에 따른 위계적 방식으로만 관계한다. 그 영향으로 시장적 자아는 비대해지며 사회적 상호 작용은 급속도로 위축된다. 자의식은 하늘을 찌르지만, 자존감은 바닥을 긴다.

선흘의 할망들은 최소연 작가와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 삶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림을 통해 선흘이라는 장소에서 자신들의 ‘본풀이’를 시작했다. 본풀이란 제주의 무속에서 신들의 본(本)을 푼다는 말로 신들의 내력을 밝혀주는 이야기를 뜻한다. 장소와 내력, 이것이야말로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만드는 핵심 디테일이 아닌가.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할망들에게 자기 삶의 디테일을 되찾는, 문자 그대로 본풀이였다. 장소와 내력, 곧 본풀이가 있는 존재, 그가 바로 신이다. 본풀이를 통해 할망들은 ‘기막힌 신’이 된 것이고, 선흘은 이 ‘기막한 신들의 세계’가 됐다.

 

사회가 돌아오니 희망이 생겼다
제주 선흘마을 초록(홍태옥) 할망이 이야기를 만드는 학생들과 함께 드로잉 워크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초록 할망의 그림에는 항상 로즈메리가 있다. 소셜뮤지엄 제주 제공

제주 선흘마을 초록(홍태옥) 할망이 이야기를 만드는 학생들과 함께 드로잉 워크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초록 할망의 그림에는 항상 로즈메리가 있다. 소셜뮤지엄 제주 제공


 

그렇기에 이들이 마을 체육관에 모여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국가도 시장도 파편도 아니라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소막 할망은 “화장하고 연극허난 기분이 잘도 좋아. 꿈에나 생각했나, 팔십구세 할망이 너무 재미나”라고 자기 그림에 썼다.(많은 참가자는 소막 할망의 이 말을 보며 사회적 삶을 ‘잃고’ 집에 ‘누워’ 있는 부모를 생각하며 펑펑 울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림 그리러 가는 것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다른 할망이 나보다 더 잘 그린 것 같으면 그걸 가져와 밤새워 다시 그리고 또 그리며 더 잘해보고 싶은 밉지 않은 질투도 마음에 돌아왔다. 몸도 마음도 살아났다.

워크숍에 참여한 학생들이 “할머니, 이 그림은 왜 이렇게 그리신 거예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의미가 뭔가요?”라고 물으면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 것은 몰라. 학생들이 서울에서 이렇게 내려와서 우리랑 같이 그림을 그리니까 좋아. 재밌어. 신나”라고 말씀하셨다. 함께 새로운 것을 도모하고, 도모하기 위해 같이 궁리하는 것이 삶에 돌아왔다. 저 멀리 있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나와 같이 있는 존재(내 곁에 있는 이들을 ‘임재’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영성적 태도야말로 지금 동시대인에게 필요한 관점이다. 그렇기에 이 전시회의 이름이 ‘기막힌 신들의 세계’인 것이다.)를 환대하고 같이 도모하는 것에 초대하고 정성을 기울이는 것보다 더 분명한 게 어디 있겠는가.

제주 선흘마을 마을 체육관에서 할망들과 학생들이 모여 함께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소셜뮤지엄 제주 제공

제주 선흘마을 마을 체육관에서 할망들과 학생들이 모여 함께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소셜뮤지엄 제주 제공


물론 희망은 변방에서 시작된다는 말은 변방에 대한 낭만화가 아니다. 변방이야말로 ‘근대 자본주의’나 ‘서구’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무엇인가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는 ‘원시적 열정’에 대한 노스탤지어적 낭만화가 아니다. 마을에서도 할머니들이 그림을 그리고 외지인들이 찾아오고 주목받으면서 왜 긴장과 갈등이 없었겠는가. 자칫하면 텃세가 되고 삐끗하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것’이 되는 데 대한 경계가 왜 없었겠는가. 그런 갈등 속에서도 ‘사회’가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의 중요함을 아는 마을 안팎의 사람들이 나서면서 다시 공간이 열리고 새로운 것이 도모되는 것,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갈등이 고조됐을 때 마을의 한 ‘젊은’ 분이 이런 말을 했다. 그림 선생이 찾아오고 할머니들이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보러 또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서 자기 노년에도 미래가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고 말이다. 연세대 명예교수인 조한혜정은 학생들에게 한 강연에서 그 ‘젊은 분’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학교도 닫고 그림 선생도 떠나면 우리 마을은 뭐가 될 거라? 귀곡산장! 앞으로 노인 요양시설을 짓자고 하는데 난 늙어서 그런 요양원 가서 수면제 먹고 묶여 있다 죽을 생각 없어요. 나는 늙어서 그림 그리면서 즐겁게 살다 죽을 거라!”고. 조한혜정은 ‘귀곡산장’이냐 재난 공동체냐가 지금 인류가 직면한 선택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기막힌 신들의 세계’ 포스터. 소셜뮤지엄 제주 제공

‘기막힌 신들의 세계’ 포스터. 소셜뮤지엄 제주 제공


각자 고유함을 위해 과감하게 연합한다

선흘마을의 전시는 삶의 공간에서 분리된 중앙집권적인 한 공간에서 열리지 않는다. 할망들의 삶의 공간인 창고나 빈 곳을 전시공간으로 바꿨다. 무지개 할망의 ‘올레 미술관’은 제주 현무암의 색감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바닥을 검은색 나무로 깔았다. 벽은 제주 돌담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낮게 통유리로 내었다. 마을 곳곳에 있는 할망들의 창고, 전시공간 자체가 작품이다. 삶과 유리된 글로벌한 스펙터클도, 삶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마을의 ‘박물관화’도 모두 거부하고 사는 자와 머무르는 자, 그리고 방문하는 자들이 ‘관계 인구’로 엮인 ‘연합’을 만들어가려 하기에 ‘소셜뮤지엄’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선흘마을의 놀라움은 ‘관계 인구’로 도모하려는 ‘연합’의 과감함과 자신감이다. 이들은 다른 존재와 연합하는 것이 개체의 고유함을 훼손한다고 생각하며 움츠러들지 않는다.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타자와 연합해 고유함을 희생하는 것도 아니다. 과감하게 연합해 서로의 고유함을 고양하고, 서로의 고유함을 고양하기 위해 과감하게 연합한다. 서로에게 ‘이용 가능’하도록 내어주지만 동시에 완전히 환원돼 용해되는 것에는 저항한다. (한겨레 기사 ‘브뤼노 라투르 유물론에서 끌어낸 낯선 신학’ 참조) 그렇기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도 거부하고 타자의 저항도 거부하는” ‘죄’에서 벗어나 고난이 있는 은혜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일체의 관계가 ‘죄’가 돼버리는 이 끔찍한 국가-시장-파편의 동시대에서 말이다.

이것은 동시에 ‘우리’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사람이 연합을 통해서만 고유성을 고양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은 이미 다양한 타자들이 ‘연합된 존재’다. 타자는 ‘나’를 무너뜨리려는 위협적 존재가 아니라 이미 ‘내’ 안에 들어와 ‘나’라는 것을 이룬 존재다. 이것을 고목낭 할망의 그림처럼 완벽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없다. 그림 속 고목낭 할망의 모습은 언제나 머리에 버섯이 돋아나 있다. 또는 반대로 고목에서 할망이 빼꼼 얼굴을 내민다. 이번 드로잉 워크숍에 참여해 그 그림을 따라 그린 학생들의 그림에는 여전히 인간과 나무, 혹은 인간과 버섯이 서로 다른 두 ‘객체’로 분리돼 있지만 고목낭 할망의 그림에는 두 객체가 연합한 몸이 하나의 ‘무대’가 되어 서 있다. “두 존재가 만나 하나의 무대를 만드는 것”(알랭 바디우)이라는 ‘사랑’의 완벽한 형상화다.

한 학생은 할망의 그림을 보고 함께 작업하면서 “나라는 우주에 존재하는 그 많은 것 덕분에 내가 숨 쉬고 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살아왔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방어적으로 움츠러들어 있던 내 삶의 문이 조금은 열리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섬망 증세도 보이며 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자신의 할머니와 다른 ‘연합’을 시도해보겠다고 했다. 섬망으로 보면 집채만 한 호랑이를 만났다고 하는 할머니의 말은 의학적으로 치료하고 관리해야 하는 ‘헛소리’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할머니의 말을 가장 많이 들은 자신은 이것을 놀라운 신화로 들어보겠다고 했다. 누워 있는 할머니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관계를 도모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보겠다는 것이다. 죽음의 스산함만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공간이 전혀 새로운 세계로 탄생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변방에서 연합하는 ‘재난 공동체’

이것이 정치공동체의 중앙이 어느 날 갑자기 귀곡산장이 됐을 때 중앙을 재건하기 위해 광화문에 나가는 소중한 마음을 품고 이야기를 만드는 학생들과 ‘변방’으로 간 까닭이다. 기적은 항상 변방에서 일어나고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과 원리는 변방에서 만들어진다. 변방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동시대 우리 삶의 공간이 귀곡산장이 되고 있음을 말이다. 중앙에서는 화려한 상품과 권력이 귀곡산장을 가려 눈을 흐리게 하지만 변방에서는 오히려 이 ‘폐허’를 응시할 수 있었다. 그 응시가 홀로라면 지방 소멸이라는 절망이 되겠지만 서로 존재를 내어주며 과감하게 연합한다면 새로운 ‘재난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도 있다. 단단해 보이던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부실한 귀곡산장이었음이 드러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희망을 만드는 기적은 변방에서 도모되고 있다. 광장에 서서 변방과 만나자.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고목낭(김인자) 할망의 그림. 할망의 그림에는 언제나 머리에 버섯이 돋아나 있다. “두 존재가 만나 하나의 무대를 만든다”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의 의미가 완벽하게 형상화돼 있다. 소셜뮤지엄 제공

고목낭(김인자) 할망의 그림. 할망의 그림에는 언제나 머리에 버섯이 돋아나 있다. “두 존재가 만나 하나의 무대를 만든다”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의 의미가 완벽하게 형상화돼 있다. 소셜뮤지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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