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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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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은 고소했네

입맛이 똑 떨어졌던 일교 어머니, 잣 냄새 맡고 달려든 청설모 물리치고 잣알 쏙쏙 빼내 배 두둑해지니 찾아온 봄
등록 2015-12-19 18:36 수정 2020-05-03 04:28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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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교 어머니는 입맛이 아주 똑 떨어졌습니다. 입에 무엇을 넣어도 모래알 씹는 것 같습니다. 한 해 여름을 그렇게 굶고 나니 허리가 착 꼬부라지고 뱃가죽이 등에 붙었습니다. 날마다 골이 우리~하게 아픕니다. 어질어질해서 일도 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무슨 중병이라도 든 줄 알고 걱정들 합니다.

일교 어머니는 이른 아침 뒷동산 잣나무 밑이 궁금하여 꼬부라진 허리로 올라가보았습니다. 웬일인지 잣나무 밑에는 누가 따놓은 것같이 잣송이가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일교 어머니는 제일 무게가 나가지 않는 양은 세숫대야를 들고 자작자작 걸어서 잣송이를 주워 나릅니다.

헛간에 두자니 쥐들이 먹을 것 같아서 윗방에다 날라다 붓습니다. 웬 횡재인지 누가 주워가기 전에 하루 종일 있는 힘을 다해 해가 질 때까지 퍼 날랐더니 윗방에 잣송이가 수북이 쌓였습니다.

어둑어둑해지자 시꺼먼 청설모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찍찍거리며 집을 싸고돌기 시작합니다. 윗방 창호지 문을 발로 할퀴어 뜯고 문구멍으로 잣송이를 보고 찍찍거립니다. 그러다 말겠거니 했는데 점점 떼거리가 몰려들며 사나운 기세로 사람도 할퀴어 뜯을 기세입니다. 종일 퍼 나른 잣송이가 아깝지만 문을 열고 에이 더러운 놈들 옜다, 잣 여기 있다. 도로 다 가져가거라. 잣송이를 청설모들이 맞거나 말거나 마구마구 냅다 던졌습니다. 새까만 청설모 떼가 잣송이를 물고 뒷동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남겨놓은 잣송이를 청설모들이 또 와서 들여다보고 달라고 할까봐 잠이 오지 않습니다. 일교 어머니는 그 밤에 비료포 종이를 뜯어 풀을 물그스름하게 쑤어 문에 바릅니다. 한 번 바르고 나니 맘이 놓이지 않습니다. 화롯불을 문 앞에 놓고 불을 쬐어 새로 바른 종이가 다 마르면 또 한 번 바릅니다. 한 서너 겹 바르고 나니 팽팽한 것이 청설모들이 들여다볼 수도 없고 발로 할퀴어도 안 찢어질 것 같습니다.

솔향기같이 향긋한 잣송이 향기가 집 안에 가득합니다. 다듬잇돌에다 잣송이를 놓고 작은 망치로 때려 바수었습니다. 잣을 까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잣알이 터져 껍질과 섞인 것을 한 움큼 골라서 찹쌀 조금 넣고 죽을 끓였습니다. 그동안 입맛이 없어 맛이라고는 몰랐는데, 아주 고소한 맛이 씹을 것도 없이 입에 떠넣으면 훌쩍 넘어갑니다. 오랜만에 배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혹시라도 청설모들이 잣송이를 찾으러 올까봐 문을 꽁꽁 닫아겁니다. 밖에 나갈 때는 문을 빼꼼 열고 청설모들이 있나 없나 살펴보고 문을 얼른 열고 드나듭니다. 두고두고 잣송이 냄새를 맡으려고 날마다 손으로 잣알을 일일이 빼냅니다. 처음에는 잣알을 다듬잇돌에 놓고 살짝 때린다는 것이 힘이 너무 들어가서 잣알이 다 터졌습니다. 일교 어머니는 날마다 꼬부리고 앉아 잣을 까다보니 잣 까는 기술이 늘었습니다. 펜치 끝에 잣알을 물리고 살짝 눌러 예쁜 잣알을 쏙 빼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교 어머니는 참깨보다 더 고소한 잣알을 날마다 여남은 알씩 꼭꼭 씹어 먹습니다. 칼도마에 잣을 놓고 왼손으로 칼끝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잣을 쫑쫑 썹니다. 쌀을 불려 절구에 몇 번 펑펑 찧어 죽을 끓이기도 합니다. 잣을 넣고 밥을 해 먹기도 합니다. 빈 잣송이는 큰 삼베 자루에 차곡차곡 담아 벽에 기대놓고 등을 대고 일렁일렁하면 등이 시원시원합니다.

일교 어머니는 겨우내 문을 꽁꽁 닫아걸고 날마다 잣죽을 끓여 먹다보니 봄이 왔습니다. 어느새 배가 두둑해졌습니다. 일교 어머니는 문을 활짝 열고 자리를 걷어내고 구들바닥에 물을 훌훌 뿌리고 장목 수수 빗자루로 알뜰히 쓸어냅니다. 자리를 빨랫줄에 걸어놓고 막대기로 퍽퍽 두들겨 자리 틈의 먼지를 알뜰히 털어내고 다시 깝니다. 빈 잣송이가 든 자루는 무슨 장식품처럼 구석마다 잘 세워놓습니다.

우리~하던 골이 어느새 다 나았는지 자기도 모릅니다. 일교 어머니는 뒷동산으로 척척 걸어 올라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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