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에서 길러 먹는 자투리 채소들.
내륙 지역의 노지에서 농사짓다 제주로 이주한 지인이 이주 첫해 남긴 말. “여기는 겨울에도 푸르러서 정말 징그럽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주변 농민들은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농사꾼에게 푸르름이란 죄다 일거리를 의미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농한기는 참 경이롭다! 매일 아침 밭에 나가고 벌레를 잡는 일이 지겨워질 때쯤 딱 맞춰서 겨울을 보내준다.
그런데 그 사람, 지금은 행복하지 않을까? 농한기의 해방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날씨가 추워진다고 인간이 겨울잠을 자는 건 아니고 식욕은 사계절 내내 작동하니까. 11월 말 폭설 이후 계속 눈이 쌓여 있는 텃밭에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러 갈 때마다 ‘셀러리를 마요네즈에 찍어 먹고 싶은데’ ‘존재감 확실한 노지 고수를 먹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겨울에 더 향긋한 제주 당근과 육지보다 일찍 먹는 채소들을 생각하면 그가 부럽기까지 하다.
결국 셀러리와 고수는 동네 마트에서 샀다. 그런데 셀러리와 고수를 보니 요즘에는 셀러리 밑동이 꽤 두껍게 잘려서 오고 고수에도 뿌리가 약간 남아 있다. 밑동과 뿌리가 온전하게 남은 채소가 있다면 무조건 낮은 컵이나 종지에 물을 조금 넣어 담가보자. 집 안에 푸르른 먹거리를 아주 잠깐은 키워볼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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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남향이 아닌 건 음지에서도 잘 크는 셀러리를 키우기에 좋은 조건이다. 햇빛 아래 셀러리 밑동을 두면 셀러리의 새잎이 타들어가지만 우리 집은 해가 잘 들지 않아 오히려 셀러리 잎이 잘 큰다. 역시 뭐든 장점과 단점은 함께 온다! 겨울에 집에서 길러 먹기 좋은, 음지에서 잘 자라는 열매채소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겨울이 조금 덜 지루할지도 모를 텐데.
고수는 온더록 잔에 꽂아 주방이 있는 동쪽 창가에 두니 새잎이 하루에 1㎝씩 자라나 두 번은 더 수확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고수를 남편은 ‘성장의 고수’라고 이름 지었다. 셀러리랑 고수가 잘 자라니 꾸러미로 온 무 윗동도 물에 담가 기르고 연한 무잎을 따서 ‘이건 루콜라다’ 생각하며 먹어본다. 고수처럼 대단한 수확량을 내주지는 않지만 물에 꽂아 기르니 일반 무청보다는 잎이 연해 한번은 재미있게 즐길 수 있으니까.
이제는 윗동을 키우기 위해 제주 당근을 주문할 계획이다. 가드너들은 지금부터 당근 윗동을 키워 잎을 조금 키운 뒤 화분에 심어 모종을 내기도 한다. 당근꽃은 정말 풍성하고 아름다워 먹지는 못해도 초여름 정원을 화려하게 장식해준다. 당근의 원형인 산당근(Wild Carrot)은 식용으로 개량된 것이 유명하지만 자태가 아름다워 정원에 심는 관상용 꽃으로 개량되기도 했다. 당근꽃 종자와 모종을 주변 정원사들에게 얻어 기르기도 했는데, 먹고 남은 당근 자투리만 있다면 씨앗을 사지 않고도 모종을 만들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극강의 가성비 아니던가!
영국의 비영리단체 ‘소일 어소시에이션’ 원예 및 농림업 책임자이자 ‘제로 웨이스트 가드닝’의 저자 벤 래스킨은 자투리 채소를 길러 먹는 것도 제로 웨이스트 가드닝이라고 소개했다. 한번쯤 자투리 채소를 길러보면 재미도 있고 새삼 채소가 생명으로 다가온다. 추운 겨울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면 줄기나 밑동을 물에 담가보자! 가장 추천하는 것은 신선한 로즈메리나 라벤더, 민트 같은 허브인데 집에 해와 바람이 잘 들고 당신이 ‘식물 금손’이라면 꽃집에서 5천원 주고 살 법한 모종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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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세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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