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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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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존중했다 아니 포기했다

첫사랑을 찾는 미국행을 포기하고 신시사이저 모듈을 산 남편,
그게 ‘찌질한 20대’의 절정이었으니
등록 2014-08-02 14:29 수정 2020-05-03 04:27
1990년대 후반 서울 홍익대 앞 펑크 라이브 카페 구석에 뮤지션들이 모여 있다. 뮤지션 제공

1990년대 후반 서울 홍익대 앞 펑크 라이브 카페 구석에 뮤지션들이 모여 있다. 뮤지션 제공

요즘 같은 음악 경쟁 프로그램에 나오는 젊은이들을 보면 실력이 장난이 아니다. 남편은 “내가 저기 나갔으면 무조건 예선 탈락”이라고 말한다. 요즘 대학 실용음악과에는 실력 있는 학생이 차고 넘친다는데 이제 우리나라는 세계적 수준의 문화 강국이 되는 일만 남은 걸까. 어쨌든 이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가 된 뮤지션들과 남편의 인생 경로는 여러모로 다르다.

남편과 연애를 시작한 뒤 그가 한때(?) 찌질한 젊은이였다는 사실을 여러 루트를 통해 확인했다. 대체 얼마나 찌질했는지 그 정도와 깊이는 가늠할 수 없으나 그의 지인들이 가끔씩 하는 말을 들어보면 대충 짐작이 된다. ‘네가 이렇게 번듯한 뮤지션이 되다니’ 혹은 ‘네가 결혼을 다 하다니, 그것도 멀쩡한 여자랑’ 유의 얘기들이다. 기자의 분석력으로 그 안에 숨어 있는 속뜻을 파악해보면 ‘너 참 찌질했는데…’다.

청소년 시절 그는 카세트테이프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록음악을 듣던 ‘덕후’였다. 고등학교 졸업 뒤후에는 대학도 직업도 다 포기하고 아마추어 밴드를 결성해 당시 서울 홍익대 앞에 있던 펑크록 라이브 클럽에 둥지를 틀었다. 아마도 이때가 그의 ‘찌질함’이 시작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 찌질함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음악을 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편지를 써오라고 했다. 아들의 확고한 의지를 읽은 아버지는 결국 그 뜻을 존중하겠다고 했다는데, 사실 존중이라기보다는 포기에 가까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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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그는 20대를 음악에 파묻혀 살았다. 홍대 앞의 작은 클럽을 전전하며 활동했는데, 당시 그곳은 미래나 현실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 찌질한 군상들의 집합소였다(고 남편이 말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음악이 전부였고 그 안에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나갔다. 어쨌든 그 시절 남편은 미국으로 떠난 첫사랑을 만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았는데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인한 환율 인상으로 미국행을 포기하고 대신 그 돈으로 계획에 없던 신시사이저 모듈을 샀다. 이후 미디 음악을 꾸준히 하던 남편은 이를 통해 레코딩과 믹싱의 세계에 입문해 오랜 기간 경험을 쌓았다. 이 경험을 토대로 현재는 작은 스튜디오를 운영해 생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인디밴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때 첫사랑을 따라가지 않고 음악 장비를 산 게 여러모로 참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최근 세계적인 록밴드 ‘너바나’의 드러머 데이브 그롤의 인터뷰가 페이스북에 떠돌았다. 그는 몇 명의 심사위원에 의해 실력을 평가받는 같은 TV쇼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음악을 하고 싶다면 말이야, 낡은 드럼을 사서 더럽고 허름한 창고 같은 곳으로 가야 해. 근데 생각해보니 참 허접하거든. 그래서 친구들을 불러. 근데 얘네들도 허접한 거야. 어쨌든 애들이 모였으니 ×나게 같이 연주를 하는데 이건 평생 두 번 다시 경험 못할 행복한 시간이거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뮤지션이 되는 거야. 너바나가 바로 그랬으니까.”

남편의 밴드가 너바나 같은 유명한 록밴드는 아니지만 남편도 결국 그들과 비슷한 길을 걸어온 셈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묵묵히 음악을 만들고 있다. 그에게 음악은 피말리는 경쟁을 뚫고 뮤지션으로 인정받기 위한 것이 아닌, 그냥 행복한 삶 자체다. 내가 그의 ‘찌질한 20대’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S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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