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션은 우리가 썸을 타던 시절 자긴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그랬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그래서 상당히 쿨하게 시작됐다. 자유로운 영혼들의 자유로운 연애 뭐 그런 콘셉트였다. 그런데 사귄 지 1년째 되는 날, 그는 평소 해왔던 말이나 행동과는 어울리지 않게 분위기를 잡더니 “평생 동안 심심할 때는 친구, 외로울 때는 애인, 아플 때는 보호자가 되고 싶다”는 편지를 낭독했다. 손가락이 오그라들었어야 정상인데 그날 와인에 취했던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던 남녀는 만난 지 1년6개월 만에 웨딩마치를 울렸다.
뮤지션은 결혼 뒤 자긴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고 그랬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내 인생 하나 책임지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자식을 낳는다는 건 일종의 ‘공포’였다. 우리에겐 집 대신 빚이 있었고, 아이에게 인생을 저당 잡히기보다는 자유로운 삶이 더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혼 1주년 여행을 다녀온 직후 아이가 생긴 걸 알게 됐다. 잠시 동안의 패닉을 극복하고 우린 앞으로의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평생 결혼도 안 하고 애도 낳지 않겠다던 남녀는 만난 지 2년6개월 만에 남들이 하는 모든 것을 따라하고 있었다.
요즘 뮤지션은 부쩍 걱정이 늘었다. 첫 번째 걱정은 아이를 어떻게 먹여살릴지다. “쓸데없이 낭비하지 말자”는 말이 늘었고 일은 더 바빠졌다. 두 번째 걱정은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다. 아이가 생긴 걸 알게 된 뒤부터 그는 주변의 아이를 키우는 지인들을 만나고 다니며 출산부터 육아에 이르기까지 귀찮을 정도로 묻고 다녔다. 물론 어디서 해답이 나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생각보다 많은 뮤지션들이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은 듯했다. 어쨌든 혼자서만 고군분투하는 삶은 아닌 것이다.
아이 키우기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실수를 저지르는 일도 있었다. 하루는 공연을 끝내고 뒤풀이를 하다가 새벽에 집에 들어온 남편이 머리를 감싸쥐며 괴로워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자신은 스스로를 성평등주의자라고 생각했는데 술자리에서 마초 취급을 당했다는 것이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이랬다. 새벽 늦게까지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은 여성이 자기에게 어린 딸이 있다고 얘기했고, 그 말을 들은 남편이 “아니 근데 이 시간까지 이렇게 술을 마셔도 돼요?”라고 말했다가 그녀에게 항의를 들은 것이었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이제 아이가 태어나면 나도 늦게까지 술자리에 남아 있기 힘들겠구나’라고 걱정하던 차에 던진 질문이었고, 듣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그래도 되느냐’는 다소 성차별적 발언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녀가 남자였어도 똑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라고 항변하는 남편에게 “듣는 여성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고 얘기해주니 그는 더 괴로워했다.
이렇듯 뮤지션과 나에게는 아직 기쁨보다는 걱정이 더 많다. 그러나 어렴풋이 느껴지는 게 있다. 특별한 삶을 살겠다던 우리가 결국 남들이 사는 인생을 자연스럽게 좇아가고 있듯이,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공포와 걱정은 아이가 태어나는 그 순간에 자연스럽게 사그라들 것이라는 그런 예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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