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문제래.”
얼마 전 남편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왔다. 그가 속한 밴드의 이미지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작가와 회의를 하고 온 참이었다. 사진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각 멤버들의 개별 콘셉트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사진작가는 멤버들 가운데 남편의 콘셉트가 가장 모호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남편은 무대 위에서건 평상시건 그다지 ‘뮤지션스럽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사람의 모습에는 대개 직업에 따르는 분위기가 묻어 있게 마련이다. 기자는 기자스럽고, 형사는 형사스럽고(아, 때로 형사들은 범인스럽기도 하다), 공무원은 공무원스럽고, 국회의원은 의원스러운 어떤 분위기를 풍긴다. 뮤지션이야말로 더욱 그렇다. 서울 홍익대 앞을 돌아다니다보면 ‘나는 뮤지션입니다’라고 써붙이고 다니는 젊은이가 많다. 그런데 남편은 아무리 뜯어보아도 어쩐지 뮤지션 같지가 않다. 그의 겉모습으로 직업을 유추해보라고 하면 10명 가운데 9명이 ‘공대 대학원생’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검은 뿔테 안경에 단정한 머리칼, 동그란 얼굴을 보면 자연히 ‘똘똘이 스머프’가 연상된다. 기타를 메고 있어도 뮤지션보다는 매니저에 가깝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30대 후반의 나이답지 않게 동안이라는 것 정도?
누군가에게 남편을 처음 소개할 때도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면 ‘의외’라는 표정이 스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남편이 뮤지션이라고 하지 않았어? 왜 이렇게 평범해?’ 심지어 결혼을 앞두고 처음으로 친정 부모님에게 인사하러 갔을 때 엄마의 눈빛에서도 정확히 같은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시 남편은 평범한 옷들 가운데서도 가장 단정한 차림으로 갔는데, 엄마는 나와 따로 있는 자리에서 “뮤지션인데 왜 이렇게 얌전하게 생겼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디뮤지션이란 머리를 물들이거나 귀걸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던가.
연애 초기에는 남편의 이름으로 이것저것 검색을 해보다가 이런 블로그 글을 발견하기도 했다. 남편 밴드의 공연 후기였는데 그 블로거는 남편에 대해 “베이스 맡으신 ○○○님, 굉장히 일반인처럼 입고 오셨습니다. 로커라고 하면 긴머리+가죽재킷+해골목걸이를 연상했던 저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셨습니다. 그대로 교단에 서도 아무 위화감 없는 굵은 줄 스웨터와 옅은 청바지! 그러나 옷과는 상관없이 (공연은) 멋있었습니다”라고 썼다. 나는 이 재미난 글을 캡처해서 기념으로 가지고 있다.
보는 사람은 재밌어도 본인은 고민스러운 법. 남편은 사진 콘셉트 회의 뒤 파마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동안 나는 남편에게 뮤지션의 이미지를 갖고 싶거든 ‘파마를 하거나’ ‘염색을 하거나’ ‘살을 빼는 것’ 중 하나만이라도 하라고 누누이 말해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드디어 실현되려나보다.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결정적인 것 하나만 더 고쳐달라고 말하고 싶다. 바로 ‘추리닝 사랑’이다. 그는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유니××에서 산 세 종류의 ‘추리닝 바지’를 돌려막기식으로 입고 다닌다. 지난해 유럽으로 공연을 가기 전에는 짐을 꾸리면서 “추리닝을 입고 유럽 거리를 활보하겠다”며 거울 앞에서 워커 위에 추리닝을 입어보는 생쇼를 펼쳐 보였다. 이 추리닝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할 때도 입고 나갔는데 디제이였던 패션모델 장윤주씨가 이를 보고 “노량진 고시원에서 온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남편님하, 당신은 ‘힙스터 패션’이라고 주장할지 몰라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이제 추리닝을 좀 벗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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