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에 대해서는 네가 주도적으로 했으면 해.”
남편의 말에 순간 벌컥 화가 났다. “왜 내가 주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라”는 말로 시작한 나의 반격은 한참 이어졌다. 얘기하다보니 그동안 쌓인 서운함까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태교에 신경 좀 쓰라며 나를 타박하던 일이나 한동안 계속 새벽 늦게 들어왔던 일까지 줄줄이 소시지처럼 이어지자, 남편은 결국 “앞으론 안 그러겠다. 출산·육아 준비도 같이 하자”고 했다. 그럼에도 뭔지 모를 억울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 드디어 우리 관계에도 슬슬 변화가 오기 시작하는 건가.
뮤지션과 나는 동등한 관계였다. 처음 그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우리의 관계는 누구 한 사람이 주도권을 잡고 끌고 가는 관계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파괴할 만큼 너무 뜨겁지 않으면서도 서로 충분히 즐겁고 만족스러웠던 우리의 연애는 그동안 쌓아온 각자의 경험답게 성숙했다. 연애의 재미는 밀당에 있다지만 그런 피곤한 걸 하기에는 30대 중반이라는 우리의 나이가 너무 ‘연로했던’ 것도 한몫했다.
우리 관계에서 가장 중요했던 점은 남녀의 성역할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남자가 왜 이래?” “여자가 그래도 돼?”와 같은 말을 던져본 적이 없다. 결혼하는 과정에서도 합리적인 양가 부모님 덕분에 모든 것을 동등하게 치를 수 있었다. 결혼 비용도, 신혼 전세비도 반반씩 부담했다. 결혼 뒤 생활비도, 여윳돈을 모을 때도 각자가 똑같은 액수를 모아서 합쳤다. 집안일도 한 사람에게 치우치지 않았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 남편 덕분에 냉장고 사정은 남편이 더 잘 알았지만, 대신 집안 청소는 주로 내가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인간적으로 동등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무척이나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균형이 깨질 수밖에 없는 일이 지난해에 일어났다. 바로 임신이었다. 임신과 출산만큼 남녀의 성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해주는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나의 생명을 잉태한다는 것 자체가 가져다주는 경이로움 속에서도 우리는 갑자기 닥친 이 일에 대해 우왕좌왕했다. 특히 여성의 몸을 통해서만 태아를 키울 수 있다는 지극히 생물학적인 이유로 우리의 동등한 관계에도 엄청난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에 나는 몸을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약자가 되어 있었고 나에게는 뱃속에서 자라는 생명의 건강을 직접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임무가 부여됐다. 이 과정에서 남편이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도움’일 뿐, 임신과 출산은 근본적으로 여성 혼자 견뎌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어떤 억울함 같은 것이 내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임신과 출산을 책임져야 하는 여성이 왜 육아까지 도맡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페미니즘 책을 뒤적이며 분노했다. 육아서적 속에 등장하는 각종 ‘모성 신화’에 진이 빠졌고, 아이의 잘못을 오롯이 엄마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론들에 넌덜머리가 났다. 직장 생활과 동시에 아이도 완벽하게 키우라고 강요하는, 그러면서도 정작 이를 위한 도움은 거의 주지 않는 정부도 한심했다. 그리고 이런 피해의식은 남편에 대한 짜증으로 분출됐다. 아마 그동안 남편의 억울함 지수도 나와 비슷하게 증가하지 않았을까 싶다.
결코 동등할 수 없는 생물학적인 조건 앞에서 우리는 아직 길을 찾지 못했다. 육아라는 큰 과제 앞에서 우리는 남녀로서 또한 엄마·아빠로서 동등한 관계를 과연 유지해갈 수 있을까. 답을 아는 이가 있다면 좀 가르쳐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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