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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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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을 때 설거지하고 싶다

물과 가스 낭비를 두고 못 보는, 때로는 너무 친환경적이고
근검절약하는 잔소리쟁이 뮤지션 남편
등록 2015-03-11 15:53 수정 2020-05-03 04:27

뮤지션에 대한 이미지는 대략 이럴 것이다.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고 집안일에는 도통 신경 쓰지 않으며 풍류를 즐기는 데만 주로 관심이 있는 약간은 게으른 인격체…. 나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는. 물론 남편 주변에 있는 동료 뮤지션들을 보면 앞에서 열거한 특징을 한두 개쯤 가진 사람이 많긴 하다. 그러나 남편과 1년 넘게 살아본 결과 그는 이런 뮤지션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그는 무척 가정적인 남편이다. 자랑으로 들리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 그에 대한 수식어를 덧붙이자면 ‘환경을 중시하고 근검절약이 몸에 밴’ 가정적인 남편이다. 더 자랑으로 들리겠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그게 아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남편은 집안일에 있어서 ‘잔소리 대마왕’이다. 그래, 오늘은 이 얘기를 하고 싶었다. 미안하다, 남편!

에너지 절약 정신이 투철한 뮤지션이 사준 라디에이터. 이 라디에이터로 올겨울 추위를 견뎠다. s기자

에너지 절약 정신이 투철한 뮤지션이 사준 라디에이터. 이 라디에이터로 올겨울 추위를 견뎠다. s기자

특히 남편이 에너지 절약 정신을 발휘하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물과 가스다. 일단, 물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처음 살림을 꾸렸을 때 남편은 내가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더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물을 너무 헤프게 쓴다는 것이었다. 나는 설거지하는 내내 물을 계속 틀어놓았고 설거지하는 시간도 길었다. 그러나 남편의 경우 1차적으로 담가놓은 그릇에 고인 물을 이용해 애벌 설거지를 한 뒤 세척제를 사용해 그릇을 깨끗이 씻고 최종적으로 헹굴 때만 물을 틀었다. 물을 쓸 때도 수도꼭지를 완전히 다 열어 세게 틀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와 달리, 남편은 절반 정도만 나오게 틀어서 쓴다. 이런 차이 때문에 신혼 초기 남편에게서 물을 아껴쓰라는 잔소리를 꽤 많이 들었다. 지금은 잔소리가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남편 없을 때 하는 설거지가 더 편하다.

두 번째는 가스. 남편은 보일러를 트는 데 상당히 인색하다. 한겨울에도 얇은 옷차림으로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집안 온도에 길들여져 있던 나와 달리, 겨울에는 춥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추우면 옷을 더 껴입으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오래된 단독주택 2층인 우리 집은 스웨터를 껴입어도 손가락이 곱을 만큼 춥다. 지난 초겨울에 한 달 가스비가 예상보다 많이 나오자 남편은 특단의 조치로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방 2개를 빼고 거실과 옷방 등의 보일러를 아예 차단해놓았다. 집안 전체가 추워지니 보일러를 틀고 자는 방도 금방 따뜻해지지 않아 추위에 떨면서 자는 일이 많았다. 춥다고 하도 난리를 치니 남편은 대신 휴대용 전기 라디에이터를 사주었는데 겨울 내내 나는 그것을 옆에 끼고 살았다. 여기에 더해 남편은 가스 낭비의 주범 가운데 하나가 온수 사용이라며 손을 씻는 등 간단한 물 사용에는 웬만하면 수도꼭지를 온수 쪽으로 틀지 말라고 했다. 아, 따뜻한 물도 마음껏 쓰지 못하는 인생이라니….

남편의 잔소리는 물과 가스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키친타월과 물티슈 등 종이류 낭비나 봉지, 랩 등 비닐을 많이 쓰는 것도 질색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잔소리에는 틀린 말이 하나도 없기에 항변할 명분도 없다. 다만 뮤지션에게 이런 잔소리를 듣고 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오는 정신적 충격이 있을 뿐이다. 언젠가는 남편이 생활비를 아끼려고 그러나 싶어 “복권에 당첨돼서 100억원이 생기면 보일러 팡팡 틀어도 되겠지?”라고 물었더니, 그는 단호하게 “아니, 안 돼”라고 답했다. 그는 뼛속까지 ‘친환경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래, 내가 포기한다. 앞으로도 겨울은 조금 춥게 사는 걸로! 흑흑. S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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