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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집을 지하 작업실에?!

음악을 시작한 뒤 오랜 지하 생활에 익숙해지다 못해 애정 갖게 된 남편의 사정
등록 2015-02-13 17:10 수정 2020-05-03 04:27

오늘도 남편은 그의 지하 녹음실로 출근했다. 반지하도 아닌 그야말로 창문 하나 없는 지하에 그의 작업 공간이 있다. 남편은 결혼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먹고 자고 일했다. 일정한 패턴 없이 배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자는 남편의 생활습관은 아마 밤낮을 구별할 수 없는 지하 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됐을 것이다. 남편을 포함해 대부분의 뮤지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지하’가 아닐까.

뮤지션의 10년 전 지하 작업실 풍경. 뮤지션 제공

뮤지션의 10년 전 지하 작업실 풍경. 뮤지션 제공

남편의 지하 생활은 음악과 함께 시작됐다. 스무 살 무렵부터 서울 홍익대 앞 지하 클럽이 그의 아지트였고, 스물두 살 때쯤에는 지하에 밴드 작업실을 만들어 일주일에 이틀 이상은 그곳에서 밴드 동료들과 함께 밤을 새웠다. 스물일곱 살 때부터는 아예 집을 나와 지하 작업실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종일 먹고, 자고, 노래를 만들고, 연습을 한 뒤 무대에 오르기 위해 찾은 공연장도 물론 지하였다. 꽉 막힌 공간에서 땀 냄새와 열기로 가득한 공연이 끝나면 상대적으로 술값이 저렴한 지하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인디 뮤지션들이 왠지 모르게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하 생활을 한 남편은 지하 공간 관리에도 전문가가 다 됐다. 5년 전에 새로 만든 그의 작업실은 다른 지하보다 상대적으로 쾌적한 편인데 에어컨과 환풍기는 물론 공기청정기와 커다란 제습기도 갖춰놓았다. 여름이면 제습기 안에서 하루에 한 양동이씩 물을 빼내고, 짧은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지인에게 작업실을 맡겨놓을 만큼 관리에 철저하다. 자칫 음악 장비들이 곰팡이나 장마로 인한 침수로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쾌적하다고 한들 지하는 지하일 뿐이다. 가끔씩 실내 오염 공기가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뉴스가 나올 때면 비염을 앓고 있는 남편의 건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결혼 전 작업실 한켠의 작은 방에서 생활하던 남편이 온몸에 가려움증이 심해져 여기저기 원인을 알아보다가 침대 매트리스 소독업체를 불렀는데, 출장 온 직원이 “이 침대는 진드기가 너무 많아 도저히 사용할 수 없으니 당장 매트리스를 교체하라”고 했다고 한다.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공간에서 오래 생활하다가 호흡기 질환뿐 아니라 피부병까지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지하 생활이 몸에 배다보니 애착을 가지는 단계까지 가게 된 걸까. 남편은 가끔씩 ‘지하 예찬론’을 펼치곤 한다. 지하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며 조용하기까지 해서 좋다나. 심지어 결혼 전에는 신혼집 전셋값을 걱정하던 나에게 자신의 지하 작업실에서 신접살림을 꾸리자고 말해 나를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이 아닐까 한다. 지하 생활이 자신의 건강에 위협을 주고 있음에도 오래 생활한 그곳에 애정을 느끼니 말이다.

어쨌든 우리의 신혼살림은 단독주택의 2층에 꾸렸다. 운 좋게 저렴한 전세로 구한 이 집은 창문을 열면 나무가 보이는 자연친화적 공간이다. 이제 인생의 절반을 땅 위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남편은 비염도 나아지고 차츰 밤낮을 구별하는 생활패턴도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신혼살림은 어려운 곳에서 시작해야 나중에 더 행복해지고 어쩌고…” 타령을 하는 남편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고 싶다. 당신의 지하 생활을 내가 구제했다! S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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