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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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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깍지’가 벗겨질때 대처법

공연 보며 ‘애정 게이지’ 고속 충전… 흠모하는 밴드 멤버들과의 친분은 덤
등록 2015-05-29 17:20 수정 2020-05-03 04:28

기타를 치는 남자는 섹시하다. 그것도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으며 관객의 환호를 듣고 있는 남자는 더 그렇다. 적당히 큰 키에 아무렇게나 소매를 걷어올린 티셔츠, 손등에 굵은 핏줄이 튀어나와 있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투박한 손가락으로 기타 줄을 튕기는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공연의 열기가 더해지면 땀에 흠뻑 젖은 채 헤드뱅잉을 하는 정열의 뮤지션. 그런데 그 남자가 무대 아래에 있는 나에게 웃음을 지어 보인다. 수백 명의 관객 중에서 나밖에 안 보인다는 듯이. 꺄악.

기타 치는 뮤지션. 뮤지션 제공

기타 치는 뮤지션. 뮤지션 제공

결혼해서 서로 별의별 모습을 다 보이며 살다보면 어느 순간 남녀 간의 애정이라는 것은 점점 희미해진다. 그럴 때 내가 남편에 대한 애정 게이지를 올리는 방법 중 하나는 그의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이다. 공연을 보다보면 기타를 치는 겉모습뿐 아니라 그가 만든 노래의 아름다움에 감동하게 되는데 어떤 면에서는 애정 게이지를 올리는 데 그게 더 효과적이기도 하다. 이렇게 눈물 나게 아름다운 음악을 창조해낸 사람이 나의 남편이었다니! (갑자기 독자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몰려온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다 약간의 과장을 섞은 것이니 이해 바란다.)

그러니까 이건 ‘콩깍지’의 문제다. 남편과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나도 그의 이런 매력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짐작건대 다른 대부분의 여자 관객도 나의 남편에게 관심이 별로 없어 보인다. (남편님하, 미안하지만 사실이다.) 남편이 속한 밴드의 공연을 처음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데 그때는 나도 남편을 보고 멋있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었다. 그 뒤 남편과 사귀기 전까지 한 10년 동안 그가 속한 밴드의 공연을 수없이 쫓아다녔지만 나의 시선은 언제나 남편이 아닌 보컬에 꽂혀 있었다. 이 밴드의 보컬은 섹시함과 청순함을 두루 갖추었으면서도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탁월한 목소리를 가진 여성이다. 사실 지금도 공연을 볼 때면 보컬을 쳐다보는 시간이 7할쯤 되고 남편을 쳐다보는 시간이 3할쯤 된다. 언니, 사랑해요. ㅠㅠ

내가 남편과 결혼한 것은 무대 위의 모습이 멋져서가 아니라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적인 매력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무대 위의 그를 바라보니 생각보다 멋있더라는 얘기다. 내 남자가 아닐 때는 몰랐는데 내 남자가 되고 나니 더 좋아 보이는 뭐 그런 감정 말이다. (그러니 글의 첫 부분에서 손발이 오그라든 분들은 이쯤에서 펴주시길.)

어쨌든 중요한 건 이거다. 뮤지션과의 결혼생활이란, 일상이 무료해질 무렵 방전된 에너지를 손쉽게 보충해줄 수 있는 고속 충전기를 갖추고 사는 것 같다는 것! 여기에 평소 흠모하던 밴드 멤버들과 한 가족처럼 지내게 된다는 것은 보너스요, 여러 다른 뮤지션들과도 두루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 또한 뮤지션 남편을 둔 자의 특권이다. 가난한 인디 뮤지션과 사는데 이 정도 특권쯤은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제 당분간은 그의 공연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조만간 뮤지션의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는 한 남편의 공연을 보러 가기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런 사실에 우울해하고 있으니 나보다 더 인디록 공연을 좋아하는 회사 선배 이아무개 기자가 말했다. “아기용 귀마개 사줄 테니 데리고 다녀.” 이 선배, 그 약속을 꼭 지켜달라!

S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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