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는 끝났다. 아니라고 우기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흔히들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라고 한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게 하나 있다. ‘출산은 연애의 무덤’이다.
일단 ‘임신’이라는 단어부터가 뭔가 로맨스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아름다운 로맨스의 결과물이 임신이지만 임신한 그 순간부터 로맨스는 저 먼 곳으로 달아나버린다. 임신 전 다이어트를 통해 인생 최저 몸무게를 기록하며 미모 지수를 경신하던(?) 나는 임신과 동시에 이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입덧도 전혀 없었던지라 그동안 참아왔던 식욕을 폭발시켰다. 그 대가로 남겨진 것은 오동통한 팔다리와 D자형 몸매였다. 나의 잘록했던 허리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임신 6~7개월쯤 남편은 내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구나. 미안해.” 그 말이 어찌나 슬프게 들리던지….
분만 과정은 또 어떤가. 아기를 낳기 위해 병원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벌어지는 온갖 의료 행위들 안에서 인권은 고려되지 않는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남편은 더 이상 남자가 아니라 보호자다. 특히 분만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동물적 몸부림이 절정을 이루는데 나는 남편이 이 모습을 어떻게 기억할지 걱정이다. 출산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만 이 과정을 겪은 뒤 머릿속에 각인되는 건 숭고함보다는 시각적 충격이 아닐까. 남편의 지인은 아내가 분만하는 순간을 본 것이 트라우마로 남아 1년 넘게 아내의 얼굴을 볼 때마다 괴로웠다면서 분만 순간은 보지 말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물론 남편과 나는 이 어려운 과정을 함께 겪어내면서 끈끈한 동지애가 생긴 것이 사실이지만 숭고함이든 동지애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출산이 끝나면 관계는 둘이 아니라 셋이 된다. 애초에 셋은 연애하기 적합한 수가 아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사는 둘 사이의 관계보다는 새로 생긴 이 조그마한 생명체를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몸도 연애보다는 육아에 맞게 변하는데 어느새 나에게 ‘가슴’은 사라지고 ‘젖’만 남았다. 신체의 기능이 이렇게 한순간에 바뀔 수 있다니. 신기한 것은 그동안 내 가슴에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이제는 거리낌 없이 ‘젖은 잘 나오냐’고 물어온다는 점이다. 이제 나에게 요구되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모성이라고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지난해 가을 임신이라는 것을 알기 며칠 전 남편과 나는 결혼 1주년 여행을 떠났었다. 강원도의 한 그림 같은 별장에서 우리는 와인을 마셨다. 누군가 아름다운 음악을 틀었고 남편과 나는 춤을 추었다. 남편이 나를 안아들고 빙글빙글 돌았을 때 깔깔대며 웃던 내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그게 불과 9개월 전이다. 이제 그런 날은 다시 오지 않는 걸까.
축 늘어진 뱃살을 껴안고 로맨스 타령을 하고 있자니 내 자신이 참 처량해 보인다. 몇 년 전 에 ‘오마이섹스’를 연재했던 김소희 기자는 육아 생활에 대해 “애무보다는 마사지가, 섹스보다는 수면이 절실한 나날”이라고 썼다. 그래, 현실을 받아들이자. 참고 견디고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제2의 로맨스가 시작될지니.
S기자
*이번 회로 ‘나는 뮤지션과 결혼했다’ 연재를 마칩니다. S기자는 육아 칼럼을 통해 다시 인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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