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자료
있는 집 자식으로 유명했던 대학 동기 A. 진짜! 프라다 가방을 메고 다니면서도, 2천원짜리 학생식당 밥을 얻어먹던 녀석. 방학 동안 유럽 여행을 하고 온 탓에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다며 식권을 가져가던 녀석. 모임 회비로 자장면 시켜먹을 때, 볶음밥 시켜먹던 녀석.
얄미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어느 날, 봉인이 해제됐다. 누군가 슬며시 A에 대해 물었다. “걔는 어때?” 입질이 왔다. B가 깨알 같은 일화를 보탰다. 나도 동조했다. A를 향해 묵혀온 감정들이 화학작용을 내며, 끈끈한 동맹이 결성됐다.
학교 정문이 내려다보이는 카페 창가에 B와 나란히 앉아 A를 제물 삼아 낄낄거렸다.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익명의 법칙을 넘어, 실명이 입에 오르기 시작했다. 시야에 불쑥 A가 들어왔다. 카페 입구로 들어선 그는 우리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설마 들었나. 어떡하지.’ 당황한 B와 눈치만 주고받았다. 결국 A와 눈이 마주쳤다. 쌩긋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A는 바로 등 뒤에 앉아 있던 여학생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의 새 여자친구였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터질 듯했다. 입김 탓일까. 커플은 곧 깨졌다. 그 뒤로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대는’ 내가 주야장천 등장하는 꿈이었다. 뒷담화 잠복기에 들어섰다.
나이가 들수록 지갑은 열고 입은 닫아야 한다는데. 최근 5년 동안 뒷담화 횟수가 부쩍 늘었다. 남 탓이 늘어나고 있단 증거다.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유하던 시절엔, 남 이야기를 입에 올릴 일이 없었다. 아, 그땐 대화 자체가 없긴 했다. 술을 마시다 ‘절대로 이해되지 않는 누군가’를 돌아가면서 말한 적이 있었다. 죽을 때까지 외부에 누설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행각으로 이어졌다. 남 이야기를 입에 올리며 ‘우리가 남이 아님’을 확인하는 서글픈 과정의 무한 반복. 그때 그 맹세는 과연 지켜지고 있긴 할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는 시대. 먹거나 혹은 말하거나. 입이라도 마음껏 놀리지 못하면 무슨 재미로 사나 싶다. 기업체 홍보일을 하는 친구 C는 업계 홍보 담당자들만 가입할 수 있는 커뮤니티 사이트가 있다고 했다. 호기심이 들었다. C는 절대로 아이디를 공유해주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기레기’ 일화가 가득할지니. 혹시 내 이야기도?
부지불식간에 부메랑이 돼 돌아오는 뒷담화에 흠칫한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 내 뒷담화를 마주해 머리 끄덩이를 붙잡는 극적인 순간은 없었다. 지난해 뜻밖의 자리에서, 아주 오래전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이 아닌 부분이 있기에 울분이 끓어올랐다. 그냥 넘기기엔 속이 좁아터졌다. 또다시 뒷담화로 풀었다. 이러니 누굴 탓하겠나. 뿌린 대로 거두는 법. 불과 며칠 전에도 입을 놀렸으니. 이놈의 입을 꿰매든지 해야지. AA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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