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부터 3년간 쓴 일기는 딱 서른 가지 버전만 있다. 잦은 전학을 틈타 일기를 돌려막은 탓이다. 학교-집-학원-친구집. 초딩의 일상은 단조롭다. 일기장 한바닥을 가득 채워줄 에피소드는 쉽사리 발굴되지 않았다. 유치찬란한 나만의 고민이 있긴 했다. 선생님이 들여다볼 것이 뻔한 일기장엔 쓰고 싶지 않았다. 어려도 사생활이 있었으니까.
두 달 만에 친구를 만났다. ‘썸’타는 남자는커녕, 뒷담화할 사람도 없다. 업데이트할 근황이 없으니 수다의 열기는 급격히 식었다. 별일 없이 지냈다. 이게 (잘) 사는 건가.
2014년 1분기. 회사 내 사무실과 인근 술집에서 8할의 시간을 보냈다.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삶. 저녁 없는 삶이다. 사무실 주위를 맴도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료에 대한 집착 탓이다. 원래 공부 못하는 애들 책가방이 무겁다. 취재 주제가 정해지면 미친 듯이 자료를 찾아 프린트한다. 실상 반의 반도 못 본다. 그런데 어디에 뒀는지 까먹고 또다시 파일을 찾아 프린트한다. 언젠가 젊은 것들 구경이라도 할 요량으로 서울 합정역 북카페를 찾았다. 그렇게 많은 짐을 이고 지고 왔거늘, 파일 하나가 빠졌다. 다시 회사로 향했다. 이것은 강박인가. 회사 앞 술집 스핑××에 매주 평균 두 차례 기웃거렸다. 매번 보는 얼굴, 비슷한 농담. 그런데 재밌다는 게 함정. 양 많고 자극적인 오징어볶음과 냉장고에 오래 둔 사이다는 뉴 솔푸드로 자리매김했다. 몇 해 전만 해도 퇴근 안 하고 스핑××에 앉아 있는 선배들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역시 반칠순의 삶은 다르구나.
회사 밀착 생활은 ‘소처럼 일한 것 같은’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제대로 썼다 싶은 기사는 한 줌. 잦은 택시 탑승을 고려해볼 때 고비용·저효율의 삶이다. TV 드라마 시청과 군것질, 숙제를 동시에 해내는 멀티플레이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지난 1월의 어느 날이 떠오른다. 오전 10시. 1시간 걸려 출근해 사무실에 앉았다. 어느새 정오. 공덕역 인근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었다. 오후 2시30분엔 서초동에서 취재 약속이 있어 노트북 가방을 챙겨 나갔다. 지갑을 빠뜨렸다. 다시 회사로 올라가니 15분 오버. 택시를 잡아탔다. 서초동을 찍고 다시 강을 건너 한남동으로 향했다. 그렇다. 엉망진창 동선이다. 기록과 계획에 약하다. 일기 돌려막기의 폐해다.
에피소드 발굴에 머리를 쥐어짜던 3월14일 오후. 춥파×가 알알이 박힌 장미꽃이 사무실로 배달됐다. 평소 ‘위기의 주부론’을 설파하던 황×× 선배의 남편이 보낸 선물이었다. 그랬다. 화이트데이였다. 꽃 선물을 받은 게 언제였더라. 식욕·수면욕이 성욕을 압도하는 삶. ‘성욕’ 신화와 싸우는 소수자로서 손색이 없다. ‘무성애자’ 인터뷰라도 할걸 그랬나보다. 7년 전 ‘팜파탈’로 살고 싶다 소망하니, 동기는 이렇게 말했다. ‘팜’ 먼저 되시라. 2014년 소망은 더욱 소박해졌다. 에피소드가 있는 삶. 그것이면 족하다. AA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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